논문 <조선후기 공식무예의 명칭 '十八技'에 대한 고찰>_박금수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4-07-23 조회수 : 107

조선후기 공식무예의 명칭 '十八技'에 대한 고찰

 

박금수 서울대학교

 

An Investigation on ‘Sippalki(十八技)’ the name of official martial art of the late Chosun dynasty

 

Park Geum Soo Seoul National University

 

 

 

요약

16세기 후반 이후 불안정한 동북아시아의 정세 속에서 조선왕조는 국방을 위해 그동안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여겼던 단병무예(短兵武藝)를 정립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그 결과 18세기 말엽에 이르러 조선은 독자적인 무예체계의 내용을 담은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출간하였다. 이 무예체계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발전시켰으며 무장(武將)과 병사의 선발과 훈련의 표준이 되었기 때문에 조선후기의 공식무예라 볼 수 있으며 이 공식무예에는 자연스럽게 명칭이 부여되었을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조선후기의 다양한 공식적, 비공식적 자료를 고찰함으로써 이 명칭이 무엇이었는지를 명확히 밝히려 하였다. 그 결과 조선후기 공식무예의 명칭은 십팔기(十八技)’였음이 밝혀졌다. 또한 이는 중국과 일본에서 말하는 십팔반무예(十八般武藝)’ 혹은 무예십팔번(武藝十八番)’과 같이 당시의 중요한 무예를 18가지로 정리하는 한일의 공통된 관습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ABSTRACT

As the result of ceaseless efforts to establish martial arts for national defense, Joseon Dynasty could have its own system of martial arts by the eighteenth century. It can be called as the 'Official martial arts of the late Chosun Dynasty' because it was made at the national level and used to train and test it's soldiers. So it is natural if you think it should have an specific name. So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make it clear what the name was by searching examples in various records both official and nonofficial. In result, we could know that the official name was 'Sippalki(十八技)' and China, Korea and Japan had a common tradition that arranged martial arts in 18 ways as done in 'Shíbābānwǔyì(十八般武藝)' or 'WǔyìShíbāfan(武藝十八番)'.

 

서론

조선중기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외침을 극복한 조선은 끊임없이 변화되는 동북아 정세 속에서 다양한 상황에 대비한 전법과 이에 필요한 무예의 정립사업을 국가의 주도로 꾸준히 추진하였다. 그 결과 18세기 말엽 정조(正祖) 대에 와서는 병법서인兵學通과 무예서인武藝圖譜通志가 통일된 체계 아래서 저술되기에 이르렀다.

무예도보통지는 정조의 친위부대인 동시에 당대의 가장 유력한 軍營이었던 壯勇營에서 출간되었으며, 그 내용을 살펴보면 각종 武器에 대한 설명만을 열거하는 것이 아니라 각 무기들을 다루는 기술의 표준을 정하였고 이들은 조선시대 내내 군사의 선발과 조련, 평가의 표준이 되었다. 정조는 자신이 직접 쓴 무예도보통지의 서문에서 '武儀式典刑을 잇는다'고 표현하여 이 책에 담긴 무예가 조선의 공식무예라는 것을 명확히 하였다. 이와 같이 나라에서 최고의 學者들과 武官들을 동원해서 무예를 정리하고 이를 책으로 발간한 예는 전 세계적으로 유일한 것이다. 따라서 이 무예의 공식적인 명칭이 존재했었으리라는 것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명칭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몇 가지의 명칭이 혼용되고 있는 상태이다. 오늘날 무예도보통지에 담겨 있는 무예는 십팔기’, ‘무예십팔반’, '십팔반무예', ‘24반무예’ ‘무예24등으로 불리고 있으며, 마상기예만을 따로 떼어내어 마상무예라고도 부르고 있다. 이러한 문제가 나타난 이유는 무예도보통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짐작할 수 있다. 먼저 이 책의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小朝께서 서무를 섭정하실 때 죽장창 등 12기를 더하여 圖譜를 만들어서 6기와 같이 통하게 講習케 하신 일이 있었다. 顯隆園의 뜻에 따라서 十八技의 명칭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짐이 외람되이 武儀式典刑을 이었으며 또 騎藝 6기를 다시 늘여서 二十四技를 수록하였다.(御製武藝圖譜通志序) 이 구절에는 십팔기와 이십사기라는 말이 모두 등장하고 있다. 십팔기에 마상무예 6기를 더하여 이십사기로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십팔기(十八技)’란 말은 풀어보면 열여덟 가지의 기술이라는 뜻이고 이십사기(二十四技)’란 말도 마찬가지로 스물네 가지의 기술이란 뜻으로 무엇에 관한 기술들인지가 이 말들 속에는 확실히 들어가 있지 않다. 또한 문맥에 따라 단순히 기술을 세고(count) 있는 것인지, 아니면 고유한 명칭을 언급하고 있는 지를 구분해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원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십팔기를 언급할 때는 십팔기의 명칭(十八技之名)'이라 하여 자를 분명히 쓰고 있는 데 반해 이십사기에 관해서는 이십사기가 된다(爲二十四技)’라고만 나와 있다. 이것만을 본다면 이십사기란 것을 고유명사로 보고 있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전체적인 내용면에서 살펴본다면 십팔기+마상6= 이십사기라는 도식이 성립하므로 무예도보통지의 편찬을 통해 정립된 무예의 명칭은 이십사기이며 따라서 이십사기를 언급할 때는 문장에서의 위치 상 반복을 피하기 위해서 자가 생략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무예도보통지兵技總敍의 한 구절을 살펴보면 십팔기를 '조선의 무예십팔반'의 명칭이라고 하고 있다.

 

소조께서 서무를 대청 하실 때 武藝新譜를 편찬하도록 명하시고 죽장창, 기창, 예도, 왜검, 교전, 월도, 협도, 쌍검, 제독검, 권법, 편곤의 12기를 증입하여 원보의 6기와 아울러서 十八技를 정하셨다. 조선의 武藝十八般의 명칭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무예도보통지의 서문을 보면 '십팔기'가 무예의 명칭으로 쓰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여기에 마상기예 6가지가 추가되어 '이십사기'가 이후의 공식명칭이 되었다는 주장과 또한 십팔기는 步兵이 익힌 무예일 뿐 騎兵의 무예까지 총칭한다면 '이십사기' 또는 '이십사반'이 맞다는 주장이 있고, 또한 '무예십팔반' 혹은 '십팔반무예'라는 말도 십팔기라는 말과 혼용되고 있어 조선후기 공식무예의 명칭을 무엇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상당한 혼란을 주고 있다.

결국 이 문제는 무예도보통지의 내용만을 검토해서는 온전히 해결하기가 힘들며 무예도보통지의 출간 이후의 다양한 기록물들에서 보이는 실제 용례를 살펴봐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十八技', '十八般', '二十四技', '二十四般'라는 단어가 쓰이는 기록물들을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등의 관찬사서(官撰史書)류와 각 군영(軍營)의 기록, 문집류와 민담, 판소리 등의 민간영역 등으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1. 관찬사서(官撰史書)류의 기록

 

장용영 十八技軍에게 매초마다 15명씩 돌아가며 기예를 연마하도록 하였다. (日省錄 179044)

 

장용영의 十八技敎官 장평을 邊將에 제수하도록 명하였다.(日省錄 17931226)

 

위의 기록에는 장용영에 '십팔기군', '십팔기교관' 제도가 있었고 따라서 '십팔기'라는 말이 고유명사로 쓰였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십팔기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뒤에 다시 다루도록 하겠다.

정조의 업적을 기록한正祖大王行狀(正祖實錄)에서는 무예도보통지가 간행된 정조 14년에 대한 기록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정조 14) 겨울에 健元陵穆陵, 元陵을 배알했고, 武藝圖譜가 완성되었다. 景慕宮 대리 청정 당시 戚繼光의 곤봉 등 6기에다 죽장창 등 十二技를 더 보태어 그것이 바로 十八技였는데, 왕이 거기에다 또 騎槍 4기를 더 늘리고 原圖譜續圖譜를 합쳐 인쇄하여 쓰도록 명했다.(正祖實錄,正祖大王行狀)

 

여기에는 '이십사기'라는 표현이 없을 뿐만 아니라 마상재와 격구에 대한 언급도 보이지 않는다. 이에 비해 '십팔기'라는 말은 무예도보통지의 서문에서와 마찬가지로 분명히 하나의 명칭으로 쓰이고 있음이 확실하다. 결국 조선후기 공식무예의 명칭에 대한 논란의 핵심 중의 하나는 사도세자에 의해 '십팔기'가 정립되어 武藝新譜가 편찬되고 정조에 의해 마상기예 6가지가 더해져 '이십사기' 또는 '이십사반' 무예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행장은 정조의 死後에 쓰여졌기 때문에 무예도보통지의 출간으로 공식무예의 명칭이 '이십사기' 등으로 변경되었다면 그것이 여기에 실려 있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보다 후대의 기록을 살펴보면,

상께서 우리나라는 軍容에 있어서 오로지 戚法만 숭상하는데, 월도·십팔기는 모두 적군과 대진하여 쓸 만한 법인가?”(純祖實錄순조 881)

 

여기서 '戚法'이란 조선의 병법이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의 척계광이 지은 紀效新書練兵實紀를 기반으로 발전해온 것을 말한다. 武藝諸譜기효신서에 수록된 장창, 낭선 등의 6기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편찬되었으며, 무예도보통지무예제보를 계승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앞으로 살펴볼 다른 기록들에서도 이러한 척계광 병법의 계승의식을 살펴볼 수 있다. 어쨌든 여기서는 임금과 대신이 국가의 병법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중이며 이때 무예의 명칭을 '십팔기'라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 기록에서는 '十八般武技'라는 용어가 등장하는데 '십팔기'와 같은 말로 보인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 '十八般技', '十八之技' 등의 용어가 간혹 보이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논의 하도록 하겠다.

 

(상께서) "대궐에 일을 보는 무리 중에서 무예가 武藝廳보다 더 뛰어난 곳이 없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임진란 이후에 훈련도감을 설치하였고, 柳成龍이 도제조가 되었는데, 이는 戚繼光禦倭法을 써서 군사를 훈련하였으므로 지금 군사를 선발하는 법이 十八般武技를 최상으로 치고 있습니다.”(承政院日記고종 11429)

 

무예청은 인조 때 설치되었으며 훈련도감에 소속된 왕의 최측근 호위부대로서 최고의 기량을 지닌 무사집단이었다. 이들을 선발하고 훈련시키는 무예가 십팔기였던 것이다. 이처럼 정조에 의해 무예도보통지가 편찬된 이후로도 공식무예의 명칭으로 계속해서 '십팔기'가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 각 군영(軍營)의 기록

 

영조 기묘년에 소조께서 죽장창, 기창, 예도, 왜검, 교전, 월도, 협도, 쌍검, 제독검, 본국검, 권법, 편곤 등 12기를 증입할 것을 명하고 예전의 6기와 합하여 18기가 되었다. 십팔기의 명칭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訓局捴要刱設)

 

위의 기사는 훈련도감의 제반사항을 정리해놓은 훈국총요에 실려 있는 것으로, 이 책은 고종년간에 훈련도감에서 펴낸 것이다. 그 중 창설편에서는 훈련도감의 창설과정과 고종대까지의 변화과정을 기술하였는데, 십팔기에 대한 설명 이외에 정조대의 무예도보통지의 편찬이나, '이십사기'와 같은 것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또한 훈련도감군의 구성을 설명해 놓은 軍摠편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보인다.

 

別技軍 : 馬步軍待年軍 중 나이가 어리고 건장한 자를 가려 뽑아 교관을 붙여 2월부터 9월까지는 琵琶亭에서, 10월부터 정월까지는 下都監에서 十八技를 연습한다.(訓局捴要軍摠)

 

훈련도감의 별기군이란 신체조건이 좋은 군사를 골라 무예연마에 총력을 기울이도록 하는 직제를 말하는데, 이들에게 십팔기를 연습토록 했다는 것이다. 위 기사에서 특히 눈여겨볼 것은 馬軍步軍의 구분 없이 함께 모아 '십팔기'를 연마시켰다는 것이다. 서론에서도 언급했듯이 혹자는 십팔기에는 마상기예가 없으므로 보군만이 익히는 것이고 '이십사기'라고 해야 보군과 마군 전체가 익히는 무예의 명칭이라고 주장하곤 한다. 이점과 관련해서 다음 기사를 살펴보자.

 

初日에는 布陣을 연습하고 中日에는 施陣技藝[十八技], 終日에는 휴식하며 번을 선다.(壯勇營大節目外營留防)

 

위의 기사는 장용영의 운영세칙을 정리한 장용영대절목중 수원화성에 머무르며 군사훈련을 하는 규정을 담은 외영류방의 한 부분이다. 여기서는 마군과 보군 구분이 없는 전체 훈련의 규정을 담은 부분으로 '기예' 밑에 '십팔기'라는 주석을 달아놓았다.

그림1.외류영방

 

 

장용영대절목의 또 다른 기사를 살펴보면,

 

四等試射 전 가운데 달에 能技軍十八技軍을 막론하여 함께 각 기예를 시험하여 능기군 중 포기하거나 가 둔한 자는 십팔기군으로 내려보내고 십팔기군 중 숙련되어 가장 잘하는 자는 능기군으로 올린다.(壯勇營大節目私習)

 

앞서 나왔던 '십팔기군'에 관련된 내용으로 일년에 4차례 심사를 통해 능기군과 십팔기군의 昇降을 조정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장용영대절목軍制편에는 능기군이나 십팔기군의 설명은 보이지 않는다. 이들은 무예훈련과 심사에 관련된 규정을 정리한 사습부분에서만 언급되고 있다. 또 하나의 문제는 능기군과 십팔기군은 일년에 4차례씩 인원이 그때그때의 심사 결과에 따라 바뀐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각각 독립된 부대의 명칭이라고 보기는 힘들고 군사 개개인의 무예기량을 구분하는 용어로 봐야할 것이다. , 善騎隊牙兵 중에서도 능기군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십팔기군에 편제되어 더 많은 무예수련을 해야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앞에서 본 일성록의 기록에서 '매초마다 십팔기군 15명을 뽑아 기예를 돌아가며 기예를 연마하도록 한다.'라는 내용이 이와 관련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장용영에서 십팔기라는 말은 마군, 보군에 상관없이 모든 군사가 익히는 무예의 명칭이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무예도보통지의 편제를 보아도 4가지 馬上技藝는 독립된 장으로 함께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騎槍은 장창 등의 각종 창술의 마지막에, 마상월도는 월도의 뒤편에, 마상쌍검은 쌍검의 뒤에, 마상편곤은 편곤 뒤에 각각 부록처럼 실려 있다. 가령 騎射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서서 활을 쏘는 법, 步射를 할 줄 알아야 하듯이 기병들도 당연히 먼저 말을 타지 않고 무예를 익혀야했고, 꾸준히 십팔기에 속한 장창, 월도, 쌍검, 편곤을 훈련했던 것이다.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마상기예에 대한 설명이 다른 기예에 대한 설명에 비해 매우 소략한 것도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관련되어 군영의 기록은 아니지만 여기서 살펴볼 것이 있다. 純祖의 시문집인 純齋稿5권에는 十八般技附馬技銘에서는 십팔기의 각 종목의 설명이 쓰여 있는데, 그중 월도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손잡이는 여섯 자에 칼날은 두 자이며 황룡으로 장식한다 .... 말위에서도 쓰는데 세는 거의 같다. 이는 월도이다."

 

, 월도와 마상월도를 별개로 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머지 기창, 쌍검, 편곤도 마찬지로 서술되어 있다.

한편 '이십사기'란 말이 무예도보통지외에 나타나는 기록이 있어 살펴보았다. 장용영에서 일어난 일들을 기록한 壯勇營古事에는 무예도보통지편찬과 관련된 기사가 다음과 같이 나온다.

장용영에서 무예도보통지를 진상하다.

- 무예제보에 실려 있는 곤봉, 등패, 낭선, 장창, 당파, 쌍수도 등 6기는 척계광의 기효신서에서 나왔는데 ... 상의 즉위 초에 기창, 마상월도, 마상쌍검, 마상편곤의 4기를 증입하라 명하였고, 또한 격구와 마상재를 붙여 24기가 되었다. ( 1790429)

 

위의 기사를 살펴보면 기창, 마상월도, 마상쌍검, 마상편곤이 정조의 즉위 초에 증입되었고, 격구와 마상재는 무예도보통지가 편찬될 당시에 붙여 넣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정조의 즉위 초부터 무예도보통지가 편찬되는 정조 14년까지의 기간에는 '22' 상태였던 것이다. 그런데 騎槍의 경우 그 (동작설명부분)의 내용이 조선 전기에 정립된 經國大典에 나오는 기창의 시취규정과 같다. , 여기서 '증입'하였다는 것은 없던 것을 만들어냈다기보다는 '한권의 책'으로 묶었거나 당시의 정규 시취훈련내용에 집어넣었다는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격구, 마상재 외에는 모든 항목의 ''자가 붙어있는 것이다. 아래의 그림을 보면 <마상편곤보>의 시작 부분에 ''자 써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사도세자가 십팔기를 정립했을 당시에도 최소 騎槍에 따라 행해지고 있었고 다른 마상기예도 가 있는 상태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예이십이기'라는 말이 만들어지지는 않았듯이 무예도보통지편찬 이후에도 '이십사기'란 말은 공식무예의 명칭으로는 쓰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림2.마상편곤보

 

'이십사기'라는 말은 위의 기사에서처럼 '총 이십사기(凡二十四技)'와 같이 무예도보통지의 편찬과 관련되어 그 項目의 총수를 말할 때 뿐이며 그 외에 명확히 고유명사로 쓰이는 경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무예도보통지병기총서'' 부분에 보이는 아래의 구절을 살펴보면 더욱 명확해 진다.

 

지금과 같이 태평한 시대에 유용한 서적을 편찬하는 일은 외적에 대한 경각심을 갖고 침입을 막는데 실효를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무예신보와 구보(武藝新舊譜) 스물 네 가지 항목(二十四目)을 모두 사여한 것을 경들이 자세히 살피고 마름질하여 엮은 것에 무예도보통지라는 이름을 내린다.

 

이 부분은 정조가 무예도보통지의 편찬 의도와 제목을 정하는 과정을 설명한 부분으로 스물 네 가지 항목(二十四目)’이라는 말이 서문에서 나오는 이십사기(二十四技)’와 같은 맥락에서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십사반무예'이라는 말은 그 용례를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3. 문집류의 기록

 

여기에서는 앞에서 살펴본 관찬사서와 각 군영의 기록과 같은 공식적인 기록 외에 개인의 문집류에 보이는 기록들을 살펴보겠다. 우선 무예도보통지의 집필자 중의 하나인 이덕무의 문집인 靑莊館全書에 수록된 城市全圖를 살펴보겠다. 이것은 칠언시로 1백 운()으로 되어있는데 그 중 몇 구절을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세심대 꽃이 필운에 비치니

영광의 빛 천 송이 만 송이로다

이영의 젊은 장수 홍옥처럼 고운데

한가하게 구정에서 십팔기를 관람하네

 

이 시조는 이덕무가 정조에게 바친 것으로 당시의 한양의 평화로운 풍경을 읊은 것인데, 젊은 장수가 구정(毬庭), 즉 연무장에서 십팔기를 훈련하는 것을 한가롭게 지켜보고 있는 풍경을 묘사하는 부분이다.

다음으로는 앞에서도 잠시 살펴본 순조의 문집인 순재고중 무예청에 소속된 武藝別監의 창설과 훈련, 임무에 대한 설명이 실려 있는 武藝別監刱設記를 살펴보면 무예별감은 십팔기로 훈련시켰으며, 특히 월도와 본국검을 가장 중요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예별감은) 군인 중에서 뽑아 戚師十八之技로써 가르치며 ... 월도와 본국검을 으뜸되는 기예로 삼는다.

 

앞에서 본 '十八般武技', '十八般技'나 위의 '十八之技''十八技'에 가짓 수를 뜻하는 ''이나 '', ''가 첨가된 것으로 특히 순조대에 이러한 표현들이 눈에 띄는데 내용상 모두 십팔기와 같은 뜻임을 알 수 있다.

다음에 살펴볼 자료들에서는 '十八般武藝', '武藝十八般'과 같은 단어가 등장한다.

 

a. 기사와 기병은 十八般武藝를 몸에 갖춘자로서, 騎射騎槍, 飛刀, 舞槊에 능하다. 날쌔고 용감하며 맹수처럼 싸움에 이기니 농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정약용, 與猶堂全書 經世遺表)

 

b. 무예는 열여덟 가지

봄바람은 스물 네 가지일세

온 세상 평화로운 경지에 오르니

사람들은 맑고 명랑한 세상에 사누나

(이덕무, 靑莊館全書 壯勇營春帖)

 

c. (). ‘십팔반무예(十八般武藝)라 하는 것은 1 (), 2 (), 3 (, ), 4 (), 5 (), 6 (), 7 (), 8 도끼(), 9 (), 10 (), 11 (), 12 (, ), 13 채찍(), 14 (), 15 (), 16 파두(把頭), 17 면승투색(綿繩套索), 18 백타(白打)이다. 선조조(宣祖朝) 때 동정(東征)한 중국 장수로부터 곤봉(棍棒) 등 여섯 가지 기술을 배워서 도보(圖譜)를 만들고, 영종(英宗) 기사년에 소조(小朝)에서 대리(代理)할 때에 죽장창(竹長槍) 12()를 도보에 보태었으니, 십팔기의 명칭이 이에서 비롯되었다. 정종(正宗)조 때 또 기예(騎藝) 6기를 다시 증가하여 24기를 만들고, 명하여 책을 만들어 이름을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라 하였다. (이긍익, 練藜室記述)

 

b 에서 '武藝十八般'은 그 아래의 댓구와 맞춰볼 때 하나의 고유명사라기보다는 '무예() 열여덟 가지'로 풀이되어야 한다. 이 시조는 정조가 이덕무를 비롯한 여러 신하들을 장용영으로 불러 모아 시를 지어 바치게 한 것인데, 장용영에 '열여덟 가지의 무예'가 갖추어지고, 스물네 가지의 봄바람이 불어오니 태평성대임을 노래한 것이다.

이에 비해 자료 c에서 표제어인 '十八般武藝'는 하나의 고유명사로 쓰이고 있으며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三才圖會, 水滸傳등에 그 기록이 보이나, 시대에 따라 그 내용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또한 이 십팔반무예라는 말은 일본에서도 쓰여 왔으며 일본에서는 '무예십팔번(武藝十八番)'이라고도 했다. 자료 b의 원문에서도 확인 할 수 있듯이 ''이나 ''은 모두 '가지 수'를 의미한다. 어쨌든 그 내용을 살펴본다면 이것은 특정한 무예의 기술체계나 문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당시에 알려진 '모든' 武器와 무예와 관련된 馬術, 水泳術 등의 기술을 열거해 놓은 것이다. 이렇게 한 범주에 속하는 사물을 가려서 열여덟 가지로 정리하는 것은 조선, 일본을 포함하는 중국한자문화권의 특징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위의 자료 c에서 '십팔반무예'를 설명하면서 뒷부분에 자연스럽게 '십팔기'를 언급하는 것을 볼 때 조선에서는 이 두 개념이 혼용되어 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십팔반무예'는 매우 일반적인 개념일 뿐이지만 조선의 십팔기는 역대 국왕의 명령에 의해 구체적인 기예가 집대성된 것으로 그 차이는 분명하며 십팔기란 명칭에는 '무예'자가 빠짐으로서 고유명사로서의 특성이 더욱 강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굳이 이 둘 간의 관계를 정리하자면 '조선의 십팔반무예는 십팔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백과사전류 또는 문집류 이외에, 특히 각 軍營의 공식적인 기록에는 주로 십팔기라는 명칭이 쓰였고 십팔반무예라는 말은 찾아보기 힘들다.

또한 일본에서 말하는 십팔반무예에는 馬術, 즉 말타는 기술이 한 항목으로 들어가 있는 반면에 중국의 십팔반무예나 조선의 십팔기에는 마술이 없다. 그럼에도 자료 a에서는 騎士騎兵'십팔반무예'를 몸에 갖춘다고 하였다. , 십팔반무예라는 것은 꼭 열여덟 가지의 기예만이 아니라 장수 또는 무사로서 갖추어야 하는 다양한 무예를 아우른다고 봐야할 것이다. 또한 중국과 조선에서는 무사라면 기마술은 기본적으로 익혔기 때문에 굳이 언급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弓術이 조선의 십팔기에 없는 이유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예는 아래의 정약용의 시조에서도 볼 수 있다.

 

홀연 쓰러져 죽은 체 비장과 흡사하고

홀연 뛰어 세차게 치는 모습 원공같네

척계광의 무예 십팔기 중에

이 기예가 우리나라 들어왔다 말하는데

기마전을 잘 하는 건 말 잘 몰기에 있으니

말과 한 몸 되어야만 유능한 기사고 말고

( 정약용, 與猶堂全書 詩文集 '大駕至鍊戎臺閱武 觀馬上才有述' )

 

위 시조는 정약용이 정조가 鍊戎臺에서 閱武할 때에 행해진 마상재 시연을 보고 그 광경을 읊은 것으로 이러한 기예가 '십팔기'에 들어간다고 하고 있다. 여기서 살펴본 자료들은 모두 무예도보통지가 발간된 정조14년 이후의 것들로, 무예도보통지가 발간된 후에도, 또한 마상기예를 포함한 당시의 공식무예의 명칭은 십팔기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4. 민간 영역의 기록

조선후기 공식무예의 명칭을 민간인들은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는 어쩌면 더욱 중요하게 검토해볼 사항일지도 모른다. 민간영역에서까지 통용된 것이라야 그 명칭의 전통성이 보다 확고하다고 할 수 있으며 오늘날 우리의 무예문화를 다시 정립하는 데 그 밑받침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에 나오는 몇 가지의 자료를 통해 당시 공식무예의 명칭에 대한 민간의 인식을 살펴 볼 수 있다.

현재 남산의 국립극장 뒤편에 위치한 유서 깊은 민간 활터인 石虎亭에는 1956년에 만들어진 石虎亭重修記라는 제목의 현판이 있는 데 그 전반부 내용이 다음과 같다.

 

漢陽南木覓山下石虎亭이 있으니 卽多士習藝이라 李朝初로부터 三藝講習하여 其才試選하니다. 에서 由出이라 本亭刱建歷代未詳이오나 獎忠壇後麓十八技舊址가 있어서 檀紀四二三0年 光武元年丁酉七月之望有志諸賢協助努力하여 是亭創建하고...

 

위의 내용은 광무원년인 단기 4230(1897)에 장충단 뒷쪽 기슭에 십팔기 옛터(十八技 舊址)가 있어 그 곳에 석호정을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장충단은 광무4(1900)에 옛 南小營 터에 설치되었다. 남소영은 御營廳分營으로 營舍의 규모가 194에 이르고 부근에는 군영과 관계있는 건물이 집결되어 있었고 慕華館과 더불어 武科 初試를 자주 치렀던 장소이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십팔기 옛터'란 남소영의 무예훈련장[鍊武場]을 말하며 일제에 의해 조선군대가 해체된 이후에도 민간에서는 그곳을 '십팔기 터'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중국 연변 조선족의 민담을 채록한 민담집 삼태성에는 삼태성 설화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셋째 아들은 십팔반무예에 능통한 재간을 닦았는데 보검을 휘두르면 번갯불이 이는 듯하고 활을 들면 나는 새의 눈통을 백발백중 하였다. (김선풍, 조선구비문학총서)

 

즉 주인공 삼형제 중 셋째의 신통한 무력(武力)십팔반무예를 익혔기 때문이라는 설정이 흥미롭다.

다음으로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민간문학 장르인 판소리를 살펴보자. 판소리 열두마당 중의 적벽가는 삼국지연의를 그 모체로 하고 있으며, 그 소재로 인하여 하층만이 아닌 중인과 상층으로부터도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후대에는 화용도라는 대중 소설로도 정리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판소리에는 더늠이라는 구전 문학의 특성이 있는데, 이는 부르는 이에 따라 사설과 창법에 수정을 가하는 것이 자유로웠던 것을 말하며 그에 따라 판소리 적벽가에는 여러 가지 採譜가 있다. 그 중 정권진본에는 조조의 진영이 군사 훈련을 하는 부분이 나온다.

 

천 여척 전선으로 연환계 굳이 무어 강상 육지 삼어 두고, 일등 명장 유진허여, 말 달려 창 쓰기와, 활 쏘아 칼 쓰기며, 십팔계 사습허기 만군중이 요란헐 제....(김진영, 적벽가 전집)

 

명창 송만갑 계열인 박봉술 본에도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천 여척 전선 모아 연환계를 굳이 물어 강상 육기 삼아두고 일등명장이 유진하야 말달려 창쓰기와 활쏘아 총놓기 십팔계(十八計) 사습하기 백만 군중이 요란할 제...(김진영, 적벽가 전집)

 

박봉술 본에는 십팔계(十八計)’라 하여 한문이 병용되어 있기도 하다. ‘私習이라는 단어는 군사 개개인의 무예기량을 높이기 위한 연습이고 내용상으로도 말달리며 창쓰기와 활쏘기 등을 연습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것으로 보아 십팔계는 무예의 명칭임을 알 수 있다. 십팔계란 말에 대하여 알아보기 위해 판소리 적벽가의 원전인 三國志演義십팔계란 말이 나오는 지 알아보기 위해 중국의 三國演義辭典과 이의 번역본인 삼국지사전을 이용하였으며, 조선시대에 국내에서 만들어진 삼국지연의의 번역본인 삼국지통쇽연의도 함께 살펴보았으나 십팔계란 단어는 찾을 수 가 없었다. , 십팔계란 말은 판소리 적벽가가 한국에서 불리어지는 과정에서 삽입된 말(더늠)이며, 따라서 창자에게 친숙한 단어가 사용됐을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민담의 예에서도 그렇듯이 십팔반무예또는 십팔기란 단어는 민중들 사이에서도 친숙한 단어였으므로 십팔계십팔기가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도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 중에는 십팔계라는 것을 중국무술이라고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다.

십팔기가 십팔계로 변형된 이유는 민간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이를 추정해 볼 수 있는 자료가 있다. 아래의 자료는 서울신문 1950326일자에 실린 이승만 대통령의 회고담 중 일부의 내용이다.

 

그 때는 壬午軍擾 때인데 대원군과 중전 사이에 충돌이 생겨 대원군은 도감포수 5,772명을 중국구식으로 군인조직을 해서 연주문 밖 모화관 앞에서 기예를 시킬 적에 18기예라는 것을 가르쳐서 창과 칼 쓰기와 대삼에 서서 말을 달리며 달아나는 말배에 붙었다 오르며 활을 쏘아 과녁을 맞히는 등 훈련해서 강병을 만들려고 하였으며...(국사편찬위원회, 자료대한민국사)

 

위의 기사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임오군란을 일으킨 구식군대인 도감포수, 즉 훈련도감군을 '십팔기예'로 훈련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조선 말기에 태어난 이승만 대통령이 이렇게 기억하는 것으로 보아 '십팔기예'란 말도 당시 민간에서 널리 쓰였다고 볼 수 있으며 '십팔기예''십팔계'로 발음되기 쉽기 때문에 십팔계로 표기되기도 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여기서 십팔기예는 앞에서 언급된 '십팔반기', '십팔지기' 등과 같이 한자의 의미가 통하지만 '십팔계'는 한자의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위의 박봉술 본 판소리에서 '십팔계(十八計)'라 하여 ''를 붙인 것은 발음에 맞는 적절한 한자를 채록하는 과정에서 붙인 것으로 보인다. ''는 계략, 작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무예훈련을 하는 앞뒤의 내용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광복 후 최초로 치른 개천절 경축식에서 '십팔기'가 연무되었다는 내용의 기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4278년전 117일 이 날은 반만년의 찬연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우리 조선의 국조 단군께서 강림하신 개천절이다. 이 날 해방 후 처음으로 개천절을 맞이하는 3천만 동포의 뜨거운 애국심의 적성과 단군의 위대한 광업을 우러러 보는 감격은 그칠 바이 없는데 이에 한껏 우리 민족의 의기를 선양하고 독립에의 단결을 굳게 하고자 檀君殿奉建會朝鮮國術協會 주최로 오전 10시 반부터 서울 그라운드에서 봉축식이 거행되었다. (중략) 야구장에서는 弓道, 정구장에서는 力道18등 우리나라 고유의 연무가 거행되어 발랄한 민족 약동의 호화로운드 페이젠트는 오후 2시반경에 막을 나리었다.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대한민국사, 매일신보 19451108일 기사)

 

서울 그라운드는 현재 동대문 운동장으로 조선시대에는 訓練院이 자리했던 곳이다. 이곳에서 궁도, 역도 와 함께 십팔기를 연무했다는 기사이다. 임오군란으로 인해 훈련도감 등의 구식군대가 해체된 이후에도 십팔기의 실기가 민간을 통해 전해져 내려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나 행사 당시의 사진이나 시범자 명단 등을 확보할 수 없어 더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결론

 

이상으로 다양한 자료를 살펴본 결과 십팔기 외에도 '십팔반기', '십팔지기', '십팔기예', '십팔계' 등의 변용이 보이지만 무예도보통지정조대왕행장, 일성록과 같은 정조 대의 기록과 훈국총요, 장용영대절목과 같이 무예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軍營과 관련된 문헌에서는 '십팔기'란 명칭을 일관되게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후기 공식무예의 명칭은 '십팔기'였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십팔기라는 것은 '十八般武藝' 혹은 '武藝十八番'과 같이 무예의 종류를 18가지로 정리하는 한일 삼국의 공통된 전통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무예신보의 편찬으로 정의된 십팔기는 무예도보통지의 출간 이후에도 마상기예를 포함한 조선의 공식무예의 명칭으로 쓰였으며 이러한 實例는 공식기록물에서뿐만 아니라 민간의 영역에서도 발견이 되고 있고 그 시간적 범위 또한 18세기에서 해방 후까지의 시기로 이어지고 있다.

십팔기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인 위기를 겪는 과정에서 편찬된 무예제보(선조 31, 1598)에 수록된 6기를 시작으로 하고 그 후 무예도보통지(정조 14, 1790)가 편찬될 때까지 약 200년이라는 기간 내내 국가적인 차원에서 꾸준히 무예를 갖추고 발전시키려는 노력으로 이루어진 결실이었다.

다시 말하면, 무예도보통지의 편찬은 그 前代부터 전해 내려온 무예를 통일하고 확고히 하는 작업이었지 완전히 새로운 무예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다. 특히 마상기예의 경우 효종 대에 騎兵을 위주로 하는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정예기병이 창설된 이후로 계속적으로 기병이 강화되었으며(노영구, 2002) 그에 따라 자연히 마상기예 또한 정비되었을 것이라 추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십팔기가 최초로 정립된 무예신보에도 마상기예가 정리되어 수록되었던 것이다.

무예란 것은 그 본질이 몸의 움직임에 있기 때문에 단순히 책의 편찬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무사들이 긴 세월동안 시행착오를 겪으며 쌓아온 지식에 바탕 해서 무예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동안 무예도보통지에 관한 관심은 그 안에 담겨있는 무예가 아닌, 무예도보통지란 책 그 자체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그 항목 수를 언급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당시 무예의 명칭으로 오인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실제 기예(技藝, skill)라는 관점으로 무예도보통지를 바라본다면 그 구성은 십팔기와 십팔기 중 장창, 월도, 쌍검, 편곤 등을 말 위에서 운용하는 데에 필요한 騎馬術, 그리고 기마술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행하는 일종의 군사오락인 격구와 마상재로 볼 수 있어 기예의 가지 수는 엄밀하게는 총 19가지(18+ 기마술)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예19' 등의 명칭을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며, 또한 무예도보통지의 항목 수는 24개이지만 騎槍 뒤에 騎槍交戰이 있고, 銳刀原譜總譜가 다르기 때문에 실제 (규정된 동작)의 가짓수는 26개이므로 '26반무예'란 명칭도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무예도보통지에 의해 정리된 조선후기의 무예를 되살리려는 뜻이 이를 통해 우리 체육문화의 풍부함과 역사적문화적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것이라면, 그 명칭 또한 그 시대에 실제로 쓰였던 그대로를 전하는 것이 중요한 초석이 될 것이다.

참고문헌

武藝圖譜通志

經國大典

朝鮮王朝實錄

日省錄

承政院日記

壯勇營大節目

訓局捴要

純齋稿

靑莊館全書

與猶堂全書

萬機要覽

국사편찬위원회(1968-). 자료대한민국사.

김선풍(1991). 조선족구비문학총서. 민속원.

김진영외(1998). 적벽가 전집. 도서출판 박이정.

노영구(2002), 18세기 기병 강화와 지방 무사층의 동향. 한국사학보 13355-381.

박재연(2001). 삼국지통쇽연의. 이회문화사.

서울特別市史編纂委員會(1987). 서울六百年史 : 文化史蹟篇.

정원기외(2000). 삼국지사전. 범우사.

허영환(1994). 정도 600년 서울지도. 범우사.

 

 

파일첨부 : 논문 및 자료 06 조선후기공식무예명칭연구_박금수.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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