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자료 속의 십팔기

사람들이 지속적인 관심을 갖는 대상에는 고유한 이름이 붙기 마련이다.
그러나 한국의 무예사에서 있어서 무예도보통지가 차지하는 위상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은 후에도 그 속에 담긴 무예의 명칭에 대한 혼란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다.
가장 광범위한 오해는 『무예제보』의 6기에 12기를 더한 『무예신보』에서 18기가 정해지고 『무예도보통지』에서 마상6기가 더해져 '18+6=24'이므로 '24반무예' 또는 '무예24기'로 불러야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부르면 안 된다는 법도 없다.
하지만 명칭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사람들 간의 '약속'의 산물이다.
그 약속은 특별한 계기 없이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정해질 수도 있고, 이제부터 '○○'라고 부르기로 한다는 명확한 선언 이후에 이루어지기도 한다.
어찌됐던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동안 불러온 이름이 '진짜' 이름이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얘기이다.
십팔기라는 이름은 사도세자가 『무예신보』를 만들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공식화 된 것은 정조에 의해서였다.
또한 십팔기라는 단어는 『무예도보통지』의 편찬 이후에도 계속해서 마상무예를 포함한 조선군 공식무예의 이름으로 쓰였다.
여기에서는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자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한다.

『훈국총요(訓局摠要)』중 「창설(刱設)」편

훈국이란 조선후기 최대 군영이었던 훈련도감을 말한다.
『훈국총요』는 이 훈련도감의 제반사항을 정리한 책으로 『무예도보통지』편찬된 지 거의 한 세기가 지난 고종(高宗)대에 출간되었다.
「창설」편은 훈련도감의 처음 창설되어 변화되는 과정을 요약한 것이다.
여기서는 사도세자에 의해 훈련도감에서 연마하던 무예가 정립되어 십팔기라는 명칭이 정해졌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 이후 24기 등의 명칭에 대한 언급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영조 기묘년에 소조께서 죽장창, 기창, 예도, 왜검, 교전, 월도, 협도, 쌍검, 제독검, 본국검, 권법, 편곤 등 12기를 증입할 것을 명하고 예전의 6기와 합하여 18기가 되었다.
십팔기의 명칭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훈국총요(訓局摠要)』 「군총(軍摠)」

『훈국총요』의 「군총」에서는 훈련도감을 구성하는 각 군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다. 그 중 별기군에 대한 설명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별기군(別技軍)은 마보군(馬步軍)과 대년군(待年軍) 중 나이가 어리고 건장한 자를 가려 뽑아 교관을 붙여 십팔기를 연마하는데 2월부터 9월까지는 비파정(琵琶亭)에서, 10월부터 정월까지는 하도감(下都監)에서 훈련한다.'

별기군이란 훈련도감군 중에서도 무예가 가장 뛰어난 자들로 다른 업무는 거의 보지 않고 오로지 무예수련에만 전념하는 자들이었다.
또한 이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자들은 임금을 호위하는 무예청(武藝廳)이 될 수 있었다.

『일성록(日省錄)』 1790년 4월4일

일성록은 정조대왕의 친필 일기로 정조 개인의 생활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정조대에 펼쳐진 여러 정책에 대한 정보를 찾아볼 수 있는 자료이다.
그중 정조 14년인 1790년 4월 4일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일성록(日省錄)』 1790년 4월4일
'장용영(壯勇營)의 십팔기군(十八技軍)에게 매 초(哨)마다 15명씩 돌아가며 기예를 연마하도록 명하였다.'

장용영은 정조의 친위부대로 정조시대에는 훈련도감과 맞먹는 규모를 갖고 있었다.
이를 통해 장용영에 '십팔기군'이라는 제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기사를 살펴보면 정조는 십팔기군의 훈련을 직접 챙길 정도로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성록(日省錄)』 1793년 12월 26일

앞에서 살펴본 일성록의 중 정조 17년의 기록 중에는 다음과 같은 항목이 보인다.

『일성록(日省錄)』 1793년 12월 26일

'장용영의 십팔기교관(十八技敎官) 장평을 변장(邊將)에 제수하도록 명하였다.'

장용영의 십팔기교관을 맡은 장평이라는 장수가 여러 해 동안 노력하여 군사들의 무예수준이 높아졌기 때문에 이 장수를 변장(邊將:변방을 지키는 장수)에 임명한다는 내용이다.
이 기사는 『무예도보통지』가 편찬된 지 3년 후의 기사로 십팔기가 여전히 장용영 무예의 명칭으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장용영대절목(壯勇營大節目)』

『장용영대절목』의「외영류방(外營留防)」

십팔기군과 관련하여 장용영의 제반사항과 규정을 기록한『장용영대절목(壯勇營大節目)』의 「사습(私習)」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사등시사(四等試射) 전 중월(中月)에 능기군(能技軍)과 십팔기군(十八技軍)을 막론하여 함께 각 기예를 시험하여 능기군 중 포기하거나 세(勢)가 둔한 자는 십팔기군으로 내려보내고 십팔기군 중 숙련되어 가장 잘하는 자는 능기군으로 올린다.'

앞서 나왔던 '십팔기군'에 관련된 내용으로 일년에 4차례 심사를 통해 능기군과 십팔기군의 승강(昇降)을 조정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장용영대절목』의 「군제(軍制)」편에는 능기군이나 십팔기군의 설명은 보이지 않는다.
이들은 무예훈련과 심사에 관련된 규정을 정리한 「사습」부분에서만 언급되고 있다.
또 하나의 문제는 능기군과 십팔기군은 일년에 4차례씩 인원이 그때그때의 심사 결과에 따라 바뀐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각각 독립된 부대의 명칭이라고 보기는 힘들며 군사 개개인의 무예기량을 구분하는 용어로 봐야할 것이다.
즉, 마병, 보병 등 병종이나 부대가 다르더라도 같은 능기군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십팔기군에 편제되어 더 많은 무예수련을 해야 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앞에서 본 『일성록』의 기록에서 '매초마다 십팔기군 15명을 뽑아 기예를 돌아가며 기예를 연마하도록 한다.'라는 내용이 이와 관련 있어 보인다.

『장용영대절목』의「외영류방(外營留防)」
그렇다면 여기서의 십팔기라는 말은 마군, 보군에 상관없이 모든 군사가 익히는 무예의 명칭이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무예도보통지』의 편제를 보아도 4가지 마상기예(馬上技藝)가 독립된 장으로 함께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기창(騎槍)은 장창 등의 각종 창술의 마지막에, 마상월도는 월도의 뒤편에, 마상쌍검은 쌍검의 뒤에, 마상편곤은 편곤 뒤에 각각 부록처럼 실려 있다.
가령 기사(騎射, 말타고 활쏘기)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서서 활을 쏘는 법, 즉 보사(步射)를 할 줄 알아야 하듯이 기병들도 당연히 먼저 말을 타지 않고 무예를 익혀야했으며, 전투 중 낙마하거나 말이 지친 경우에는 말에서 내려서도 싸울 수 있어야 했을 것이다.

또한『장용영대절목』의「외영류방(外營留防)」편에는 수원 화성에 있는 장용영의 외영으로 이동하여 훈련을 하는 방식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 중에는 다음과 같은 규정이 있다.

'초일(初日)에는 시진(布陣 : 진법을 펼치는 것)을 연습하고 중일(中日)에는 시진과 기예(技藝)[십팔기]를, 종일(終日)에는 휴식하며 번을 선다.'

옆의 원문을 보면 ‘기예’ 부분에 ‘십팔기’라 주석을 달아놓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순조의 문집 『순제고(純齋稿)』

혹자는 십팔기는 ‘보병의 무예’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그 주장을 확실하게 뒷받침하는 자료는 현재 발견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정조 다음에 즉위한 순조(純祖)가 쓴 다음의 글을 보면 마상기예와 십팔기를 구분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순조의 시문집인 『순제고(純齋稿)』 제5권의 「십팔반기부마기명(十八般技附馬技銘)」에는 십팔기의 각 종목의 설명이 간단하게 쓰여 있는데 십팔기와 마기(마상기예)를 구분하는 듯하나 실제 항목에는 마상기예에 대한 언급은 ‘월도, 쌍검, 편곤, 창 등은 말위에서도 사용하는데 그 세는 거의 같다’는 식이다. 그 중 월도의 설명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손잡이는 여섯 자에 칼날은 두 자이며 황룡으로 장식한다 .... 말위에서도 쓰는데 세는 거의 같다. 이는 월도이다.'

즉, 월도와 마상월도를 별개로 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머지 기창, 쌍검, 편곤도 마찬지로 서술되어 있다.

「십팔반기부마기명」의 목차. 마상기예는 따로 보이지 않는다.

월도와 마상월도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

같은 『순제고(純齋稿)』에 있는「무예별감창설기(武藝別監刱設記)」에는 무예청에 소속된 무예별감(武藝別監)의 창설과 훈련, 임무에 대한 설명이 실려 있는 를 살펴보면 무예별감은 십팔기로 훈련시켰으며, 특히 월도와 본국검을 가장 중요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예별감은) 군인 중에서 뽑아 척사(戚師)의 십팔지기(十八之技)로써 가르치며 ... 월도와 본국검을 으뜸기예[元技]로 삼는다.'

무예별감은 임금과 왕족을 근접경호 하는 근위내시를 말하는 것으로 훈련도감의 별기군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기예를 지닌 자만을 추려 임명하는 것이다.
정조 대에 장용영의 근간이 되는 장용위의 초기 30인의 무사들도 주로 무예별감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적들에게 사방으로 포위 당하여 공격을 받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임금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본국검, 월도와 같은 십팔기 중에서도 고급기예를 주로 익혔다.
  • 「십팔반기부마기명」의 목차. 마상기예는 따로 보이지 않는다.
  • 월도와 마상월도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

동궁일록(東宮日錄)

『동궁일록』1891년 5월 19일 기사
동궁일록은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純宗)이 세자시절 일상사를 수록한 책이다. 그중 1891년 5월 19일 기사에는 ‘십팔기추격(十八技追擊)’을 거행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날 순종은 군복을 갖춰 입고 말에 올라 광임문(廣臨門)과 신무문(神武門)을 거쳐 융무당(隆武堂)으로 갔다.
융무당은 현재 청와대 자리인 경복궁 후원에 있었다.
이날 융무당에는 병조판서와 각 군영의 장교, 그리고 무예별감들이 집결해있었고 예(例)에 따라 ‘십팔기추격’을 거행했다고 한다.
이는 아마도 왕세자로서 무사들의 기량을 시험하는 자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십팔기추격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빠르게 쫓아가서 친다는 뜻의 ‘추격’으로 보아 마상무예를 시험한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이덕무, 정약용의 시조

『무예도보통지』의 편찬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이덕무의 시 한편을 살펴보자.
아래는 이덕무의 문집인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 수록된 「성시전도(城市全圖)」란 시의 일부분이다.

세심대 꽃이 필운에 비치니
영광의 빛 천 송이 만 송이로다
이영의 젊은 장수 홍옥처럼 고운데
한가하게 구정의 십팔기를 관람하네
(洗心臺花弼雲映/寵光千葩與萬蘤/梨營小將如紅玉/閑看毬庭十八技)


이 시조는 이덕무가 정조에게 바친 것으로 당시 한양의 평화로운 풍경을 한 폭을 그림을 보는 듯이 묘사했다.
위는 그 중 젊은 장수가 구정(毬庭), 즉 연무장에서 군사들이 십팔기를 훈련하는 것을 (이로 인해 나라의 평화가 지켜지니) 한가롭게 지켜보고 있는 풍경을 묘사하는 부분이다.

정조대에 활발한 활동을 펼쳤던 다산 정약용도 십팔기와 관련된 시를 남겼다.
『여유당전서』의 시문집에는 연융대에서 펼쳐진 열무(閱武) 중 마상재를 보고 남긴 시가 있다. 아래의 시에서 정약용은 마상재를 보고 십팔기라고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홀연 쓰러져 죽은 체 비장과 흡사하고
홀연 뛰어 세차게 치는 모습 원공같네
척계광의 무예 십팔기 중에
이 기예가 우리나라 들어왔다 말하는데
기마전을 잘 하는 건 말 잘 몰기에 있으니
말과 한 몸 되어야만 유능한 기사고 말고
(忽僵佯死如飛將/忽躍奮搏如猿公/戚家武藝十八技/世稱此技輸我東/騎戰之能在善馭/與馬爲一斯良工)


이상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십팔기'라는 명칭이 마상무예를 포함한 조선군 공식무예의 명칭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정조대에 편찬된 자료에는 십팔기라는 명칭이 정확하게 쓰였고 이후에는 '십팔반기', '십팔지기', '십팔반무기' 등의 변형된 명칭이 보이지만 훈련도감 등의 군영에서 편찬된 자료에는 항상 '십팔기'로 쓰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명칭들도 이 '십팔기'라는 단어에 '반(般)', '지(之)' , '무(武)'를 첨가한 것으로 '조선의 무예 열여덟가지 기예'라는 동일한 뜻을 나타내고 있다. 훈련도감의 별칭을 '훈국'이라도 하듯이 당시에는 공식적인 명칭과 함께 별칭을 자주 쓰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전에는 '기예(技藝)군', '무예교관' 등 과 같이 쓰던 말들을 대신해서 정조대에는 '십팔기군', '십팔기교관'과 같이 '십팔기'라는 명칭을 엄격하게 쓰고 있다.
이는 '십팔기'를 정립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업적을 계승하려는 정조의 의지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해방 이후의 십팔기와 관련된 몇 가지 자료들을 살펴보자.

<석호정중수기(石虎亭重修記)>

석호정의 <석호정중수기> 현판
현재 남산의 국립극장 뒤편에 위치한 유서 깊은 민간 활터인 석호정(石虎亭)에는 1956년에 만들어진 <석호정중수기(石虎亭重修記)>라는 제목의 현판이 있는 데 그 전반부 내용이 다음과 같다.

석호정의 <석호정중수기> 현판

'漢陽의 南木覓山下에 石虎亭이 있으니 卽多士習藝의 場이라 李朝初로부터 三藝를 講習하여 其才를 試選하니다.
此에서 由出이라 本亭刱建歷代는 未詳이오나 獎忠壇後麓에 十八技舊址가 있어서 檀紀四二三0年 光武元年丁酉七月之望에 有志諸賢이 協助努力하여 是亭을 創建하고...'

위의 내용은 광무원년인 단기 4230년(1897)에 장충단 뒷쪽 기슭에 ‘십팔기 옛터(十八技 舊址)’가 있어 그 곳에 석호정을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장충단은 광무4년(1900)에 옛 남소영(南小營) 터에 설치되었다.
남소영은 어영청의 분영으로 실제 어영군의 주둔지였으며 모화관(慕華館)과 더불어 무과초시(武科初試)를 자주 치렀던 장소이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십팔기 옛터'란 남소영의 무예훈련장[鍊武場]을 말하며 일제에 의해 조선군대가 해체된 이후에도 민간에서는 그곳을 '십팔기 터'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매일신보 1945년 개천절 경축식 기사

또한 광복 후 최초로 치른 개천절 경축식(1945년 11월 7일)에서 '십팔기'가 연무되었다는 내용의 매일신보의 기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4278년전 11월 7일 이 날은 반만년의 찬연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우리 조선의 국조 단군께서 강림하신 개천절이다.
이 날 해방 후 처음으로 개천절을 맞이하는 3천만 동포의 뜨거운 애국심의 적성과 단군의 위대한 광업을 우러러 보는 감격은 그칠 바이 없는데 이에 한껏 우리 민족의 의기를 선양하고 독립에의 단결을 굳게 하고자 檀君殿奉建會와 朝鮮國術協會 주최로 오전 10시 반부터 서울 그라운드에서 봉축식이 거행되었다.
(중략) 야구장에서는 弓道, 정구장에서는 力道와 십팔기 등 우리나라 고유의 연무가 거행되어 발랄한 민족 약동의 호화로운드 페이젠트는 오후 2시반경에 막을 나리었다.'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대한민국사, 매일신보 1945년 11월 08일 기사)

위의 기사에서 '서울 그라운드'는 현재 동대문 운동장으로 조선시대에는 무관의 훈련과 시취를 담당했던 훈련원(訓練院)이 자리했던 곳이다.
이곳에서 궁도, 역도 와 함께 십팔기를 연무했다는 기사이다.
그런데 여기서의 십팔기가 『무예도보통지』의 십팔기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 이유는 다음 자료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대한뉴스 1959년 11월 22일자, 한중친선무술대회 기사

출처 : e-영상역사관, 대한뉴스 제214호
대한뉴스는 1959년 11월에 서울시 공관에서 열린 한중친선무술대회를 보도했는데, 이에 따르면 한국측은 진도관에서, 중국측에서는 대한 화계종(?)의 선수가 참가했다고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아나운서가 이를 '십팔기 연무대회'라 불렀다는 것이다.

기사의 전체 내용은 아래와 같다.

보기 드문 호신무술 경기에 한 중 두 나라 선수들이 묘기를 다투고 있습니다.
이것은 11월 22일 서울시 공관에서 벌어진 한중 친선 십팔기 종합 연무대회 광경입니다.
이날 한국 측에서는 서울 진도관의 수련생, 중국 측에서는 대한 화계종의 선수가 참가해서 십팔기를 다투었습니다.
이날 여자들의 경기는 한층 인기를 끌었는데, 이러한 아가씨들과 교제하려면 한층 무술의 단수가 높아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십팔기 호신무술은 남녀가 다 같이 배울 수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를 보면 당시 십팔기란 단어는 '무술' 혹은 '무예'라는 의미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마치 '미원'이 조미료를, '봉고'가 승합차를 의미하는 것처럼 고유명사가 그 의미가 확장되어 보통명사화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십팔기의 의미 확장은 그만큼 십팔기가 대표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이후 70년대에 무술영화에 의한 쿵푸 열풍이 불었을 때 민간에서 '쿵푸 십팔기'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는 데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또한 나이 드신 분들 중 어떤 분들은 십팔기를 '십팔계'로 기억한다.
이는 조선시대에는 창과 검을 다루는 무예를 '기예(技藝)'라고 부르기도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근접전을 벌이는 창검병을 '기예군'이라 부르기도 했던 것이다. 이에 비해 활쏘기는 사예(射藝)라고도 했다.
따라서 십팔기를 '십팔기예'라고 흔히 불렀다.
이는 이승만 대통령의 회고록에도 나와 있는 표현이다.
이를 빨리 발음하면 '십팔계'가 되는 것이다.
십팔계를 곱절로 늘린 '36계'라는 무술이름도 있으니, 이들은 십팔기의 역사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자의적으로 만들어져 전파된 말들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