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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문화와 ´나´ 문화(1)
  글쓴이 : 신성대     날짜 : 07-08-31 14:59     조회 : 4733    

신성대
전통무예연구가
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전통무예십팔기 보존회 회장
국군전통의장대 십팔기 사범
인터넷 신문 [데일리안 경기] 논설위원


간혹 호사가들은 한국인의 언어 습관 중 ´우리´라는 말에서 타민족에 비해 남다른 유대를 찾아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서양인들이 ´나´라는 주어를 많이 사용하는 데 비해 한국인의 ´우리´라는 표현 속에는 공동체 의식이 깃들어 있으며, 항상 ´자기´보다는 ´우리´, 즉 남을 배려하는 미덕 또한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나의´ 대신에 우리 집, 우리 식구, 우리 아버지, 우리 동네, 우리나라 등등. 일견 수긍이 가기도 하는 이러한 현상은 언어사회학자들이 보다 구체적으로 연구해야 할 점이지만, 문화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하다.

문법적으로는 분명 ´나´ 혹은 ´나의´라고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습관적으로 ´우리´라고 표현하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원인을 꼽을 수 있겠다. 앞서 여러 사람들이 주장한 대로 우선 오랜 농경 사회를 통해 다져진 공동체 의식 때문일 것이다. 농사는 혼자서 못 짓는다. 온 가족이, 때로는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누어야 한다. 그리고 함께 그 땅과 곡식을 지켜야 했다. 수렵과 유목 사회에서는 그 반대이다. 오히려 가족과 가족, 부족과 부족이 가능한 멀어지는 것이 좋다. 농사는 일손이 많을수록 더 많이 생산할 수가 있지만, 유목은 그렇지 못하다. 일손이 많다고 해서 양이 젖을 많이 생산하거나 새끼를 많이 낳는 것도 아니다. 오직 하늘에서 내리는 비(雨)의 양에 달려 있다.

두 번째는 혈연을 중시하는 씨족 사회의 유산이라는 점이다. 이는 고려 후기 일반 평민층에 급속히 퍼져 나간 족보로 인해 성씨(姓氏) 제도가 확립되면서부터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로써 개인보다는 문중을 더욱 중시하면서 ´우리´라는 표현을 선호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까닭인지 ´우리´라는 말은 다분히 ´정적(情的)´이다. 그리고 끈끈한 ´연(緣)´이 느껴진다. 함께 땀 흘리고 부대끼다 보면 미운 정, 고운 정이 들게 마련이다. 또 핏줄을 확인해 주는 성(姓)은 어떤 것으로도 끊을 수 없는 연줄이다. 이 혈연(血緣)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 뻗어 나가 ´지연(地緣)´ ´학연(學緣)´ 등 수없이 복잡한 줄기를 만들어 낸다.
그것이 전통적인 ´우리´의 사회였다. 그런데 근대화와 더불어 서양의 문물이 앞뒤 구분할 겨를도 없이 한꺼번에 밀려들어오면서 예외 없이 ´우리´도 낯선 도전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나´와 ´우리´ 사이에서 심한 심리적 갈등을 겪고 있다.

전통적인 동양의 예교 사회는 공동성을 강조한다. 사람들의 사상과 행위를 공동으로 지켜야 하는 윤리 계통 안에 규범화시켜 놓았다. 사람의 자연적인 개성과 감정 의지는 욕망의 근원이므로 이를 절제시켜야 했다. 물론 사람은 사회에서 생활하므로 좋아하고 미워하는 동물적인 정서와 욕망은 당연히 절제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범위는 사회의 문화적인 특징에서 결정된다. 농업 문명을 기반으로 하는 동양의 종법 제도는 절제된 범위를 사회의식과 사회 심리의 각계각층으로 확대시켰다.

크게는 정치사상에서부터 작게는 개인의 성격에까지 종법 사회관계와 서로 어긋나는 경향의 존재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어느 쪽에도 기울거나 치우침이 없는, 혈연관계를 주로 하여 맺어진 종법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조화와 질서는 사회의 장기적인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최고의 정신적인 원칙이 되었다. 그것이 중용(中庸) 사상이다.

천지자연 중에는 항상 조화와 분쟁이 동시에 존재한다. 조화의 형태가 바로 정체 내부의 평화로운 공존이며, 분쟁의 형태가 바로 개체 사이의 생존 경쟁인 것이다. 중용은 바로 이 조화를 발양시키는 동시에 분쟁을 배척하고 질책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개성이 강하다´라는 것은 개인의 결점으로 생각했고, 수양이 부족한 탓으로 여겼다. 그래서 모난 돌은 정을 맞아야 했고, 분쟁을 일으키는 것은 무조건 통제되었다. 한마디로 ´우리´를 위해 ´개인´적인 욕망과 추구는 엄격히 제한되고 스스로 절제하여야 했던 것이다.

´우리´에는 책임과 주체성이 결여되었다. 그러다 보니 유리할 때는 ´우리´를 찾고, 불리할 때는 ´나´를 들먹이며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 ´잘되면 제 탓이요, 못되면 조상 탓한다´는 말이 있듯이 남 탓할 여지가 얼마든지 있다. 또한 ´나의 것´이 ´우리 것´이 되고, ´우리 것´이 곧 ´내 것´이 될 수 있다 보니 습관적으로 공사(公私)의 구분이 잘 안 된다. 개인의 판단은 유보되고, 중론을 따르다 보니 부화뇌동하기 십상이다.

개인적인 자각보다는 사회적 선택, 즉 시류(時流)에 편승하는 경향이 짙다는 말이다. 책임의 경계가 불분명하고 구체적이지 못한 경향이 강하다. ´우리´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주관적이고 주체적인 생각을 억누르거나 무시할 여지가 많다. 그리고 분배의 과정에서 내 것과 네 것의 경계가 분명치 않다 보니 최종적으로는 분쟁이 발생할 소지가 많아져 끊임없이 편가르기를 하기도 한다.

서구의 ´개인´이라는 낯선 개념은 ´I´와 ´my´를 앞세우고 들어왔다.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확립된 서양의 ´개인´ 혹은 ´개인주의´가 아무런 철학적 성찰도 없이 부지불식간에 ´우리´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 데카르트의 ´주체의 자율성´, 그리고 라이프니츠의 ´개인의 독립성´으로 무장된 ´개인´은 ´계급에 맞선 평등´ ´전통에 맞선 자유´란 구호 아래 서서히 그 영역을 확대시켜 나갔다. 하지만 이 역시 단어의 표피적인 개념만 받아들였지 그 내용, 즉 그 정신과 역사를 미처 살펴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이 그토록 선망해 마지않던 휴머니즘과 민주주의의 씨앗임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들을 모두 따로따로 분절시켜 받아들인 것이다. ´개인´의 자유만 알았지 윤리 따위는 있는지조차도 몰랐던 것이다. 자유와 평등만 외쳤지 그에 따라야 할 책임과 의무, 도덕규범을 애써 모른 척해 왔다. 단순히 ´우리´의 무거운 짐을 털어내고 싶어 ´개인´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개인´은 수시로 ´이기주의´로 변질되어 ´우리´ 사이를 삐걱거리게 하고 있다. 물론 개중에는 아주 능숙하게(약삭빠르게) 둘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이들도 많이 생겨났다.

사실 서양에서의 윤리는 18세기 계몽주의 시대까지는 전적으로 종교에 예속되어 있었다.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절대적인 덕(德) 아래 개인은 신중, 절제, 용기, 정의의 덕으로 신의 명령, 신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여야 했다. 하지만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자아´에 눈뜬 인간은 신에게 맡겼던 자신의 권리를 찾아 스스로 행사하기 시작했다. 종교 개혁과 숱한 혁명을 치른 끝에 드디어 인간은 신에 대한 승리를 쟁취하게 되고, 더 이상 교회를 찾지 않아도 되었다. 이제 주일마저 하느님을 찬양하는 날이 아니라 개인의 존엄을 확인하는 날이 된 것이다.

이런 천지개벽의 전복을 겪으면서 서양 정신은 무사히 현대에 안착하게 된다. 물론 과학과 철학의 발달이 가장 큰 몫을 했을 것이다. 덕분에 그들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신과 ´개인´이 공존하는 절묘한 타협점을 찾아낸 것이다. 신으로부터 자신의 자유는 찾았지만, 신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절대적인, 인간에게는 부담스런 힘과 권한은 계속 신에게 맡겨두고, 필요할 땐 언제든지 의지하고 책임을 떠넘길 수 있도록 해놓은 것이다. 보다 더 본질적인 이유는 신을 부정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야기될 사회적 질서의 붕괴를 원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신학적 덕(德), 즉 믿음, 소망, 사랑을 잃어버린 개인들로는 온전한 사회가 유지될 수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전처럼 교회를 찾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신을 교회 밖으로 내쫓지도 않았다. 신학적 덕을 버리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덕(德)을 만들어 냈다. 자유, 평등, 박애, 절대자인 신(神)을 매개체로 한 개인과 개인, 즉 삼각 구조의 사회적 덕목을 인간들끼리의 직접적인 덕목으로 바꾼 것이다. 이런 일은 아마도 고대 그리스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자연의 덕´, 즉 신중, 절제, 용기, 정의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사실 이 네 가지는 개인적인 덕이라 할 수 있다. 책임이 따르는 실천적인 덕목이다.

반면 우리는 조선의 멸망과 더불어 신이자 스승으로 모셔 온 공자(孔子)의 위패를 아궁이에 던져 불태워 버리고 보다 힘센 서양 신을 모시게 되었다. 새로운 신은 물론 엄청나게 강하지만, 결코 엄격하지 않았다. 이제까지의 그 어떤 신보다도 자비롭고 풍요로웠다. 그야말로 어머니 같은 신이었다. 그가 권하는 것은 믿음, 소망, 사랑으로 한없이 부드러운 밀크커피와 같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유, 평등, 박애를 앞세우고 들어왔다. 물론 네 가지 자연의 덕도 함께 따라왔지만, 결코 방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우리의 눈에는 그것들이 그다지 귀한 손님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가죽 군화를 벗지 않는 무뢰한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버지니아 조승희 총기사건을 바라보는 미국과 한국의 시각이 상반된 것은 바로 이런 ‘우리’와 ‘나’문화의 차이가 아니겠는가. 세계화는 이미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다. 연(緣)을 매개로 한 배타적 민족주의를 뛰어넘어 건강한 국가주의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물론 이마저도 버리고 세계주의를 맞아야 할 때도 머지않았지만 말이다.

<이 글은 인터넷 신문 데일리안에 연재중인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