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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문화와 ´나´ 문화(2)
  글쓴이 : 신성대     날짜 : 07-08-31 14:58     조회 : 4805    

신성대
전통무예연구가
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전통무예십팔기 보존회 회장
국군전통의장대 십팔기 사범
인터넷 신문 [데일리안 경기] 논설위원


유가(儒家)의 오덕(仁, 義, 禮, 智, 信)은 사회적인 덕목들이다. 유교(유학)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교가 태어나던 그 시기의 사회상에 원인이 있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는 열국의 제왕들이 끊임없이 패권을 다투던 시절이라 허구한 날 전쟁이어서 사회가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각국의 신출내기 왕들은 군왕으로서의 기본적인 덕(德)조차 미처 갖추지 못하였으며,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 또한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

요순(堯舜) 시절에는 나라의 규모나 체제가 단순해서 오직 임금의 어진 덕(仁德)만으로도 천하가 태평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갈수록 사회가 점점 복잡하고 다양해지기 시작하여 새로운 신분 계급이 생겨나게 되었다. 법치(法治) 사상이 미처 뿌리를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복잡해진 나라 살림을 책임지게 될 새로운 관료 계층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 점을 맨 먼저 알아차리고, 이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사설 학원을 차린 이가 바로 공자(孔子)였던 것이다.

원래 무사(武士) 집안에 태어나 제례(祭禮)를 담당했던 그는, 이전까지는 상류층에만 전해져 오던 온갖 법식과 학문을 평민들에게 퍼트린 것이다. 그때 가르친 과목이 바로 주대에서부터 귀족의 자제들에게 가르쳐 오던 육예(六藝)였다. 여기서부터 새로운 문사(文士) 계급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관과 도덕 규범이 오덕(五德)이었으며, 이것으로 당시 혼란한 사회를 안정시키고 이상적인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것이다.

여러 제후들이 앞다투어 졸업생(文士)들을 채용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들에겐 학문과 지혜는 있었지만, 결코 스스로 무력(武力)을 지니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수천 년의 동양 역사에서 단 한번도 문사(文士)가 군왕의 자리를 넘보거나 빼앗은 예가 없었으니, 이보다 위험찮은 인재가 또 어디 있겠는가. 당연히 권력자는 무사(武士)보다 문사(文士)를 더 가까이 두려 하였다.

이후 중국은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대를 거쳐 학문다운 학문이 민간 사회에까지 널리 퍼지고, 문화다운 문화가 꽃을 피우게 된다. 나아가 중국뿐만 아니라 동양 사상의 기본 골격이 되어 정치, 학문, 철학, 예술 등 모든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런데 만약 공자가 춘추전국시대가 아닌 통일된 진(秦)이나 수(隋), 당(唐)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유가 사상(사상이란 것도 본질적으로는 사회적인 생각이지만)이 그토록 사회성 혹은 정치성을 띠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유학은 다스림과 복종의 학문이다. 군왕(君王)은 오직 인(仁)으로써 나라를 다스려야 하고, 무신(武臣)은 신(信)과 의(義)로써 충성해야 하며, 문신(文臣)은 지(智)와 예(禮)로써 보필해야 나라가 제대로 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유가오덕(儒家五德)이 국가의 통치 체계를 위한 신분과 계급에 따라 부여된(요구된) 의무적인 덕목임을 알 수가 있다. 한마디로 군자(지배층)의 덕(德)이지 평민의 것이 아니었다. 백성은 그저 풀잎처럼 바람 부는 대로 누울 뿐이었다.

만약 이 유가오덕이 사회적인 덕(德)이 아니고 개인적인 것이었다면, 그래서 한 개인의 자기 수양, 자기 발전을 위한 덕(德)이었다면, 상하 계급과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나에게 그것을 고루 갖추도록 권장되었어야 옳았다. 가령 서양의 ´자연의 덕´인 신중, 절제, 용기, 정의는 신분에 관계없이 완전한 인격체로 대접받기 위해 빠짐없이 갖춰야 할 ´나´의 덕목이었다. 그에 비해 인(仁), 효(孝), 제(悌), 충(忠), 신(信), 예(禮), 의(義), 염(廉), 치(恥)가 모두 ´나´의 덕이 아닌 ´우리´의 덕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모두의 덕이 아닌 군자(선비)의 덕이었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동양에서는 모든 군왕이 이 유학(유교)을 통치 이념으로 삼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부터 힘은 군왕이 갖고, 신하들은 각자 문(文)과 무(武) 중 한 가지만을 가지게 했다. 두 가지를 모두 갖추는 것은 절대 허용되지 않았다. 이에 비해 서양이나 일본의 귀족들은 문무(文武)의 구별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제한도 없었다. 오직 세력의 크기만이 염려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모든 귀족들은 스스로 무력 키우기를 서슴지 않았고, 군왕들은 힘과 권모술수로써 그들을 누르거나 달래서 자신의 왕좌를 지켜야 했다.

그렇다면 동양에는 자기 성찰을 위한 개인적인 덕목 추구가 없었는가? 삼강오륜이 국가와 사회 구조를 종횡으로 견고하게 얽어 놓아서 누구도 그 틀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유학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주자학, 양명학, 성리학이란 이름으로 변화 발전해 나갔지만, 결코 그 근본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더욱 조밀해져 나중에는 숨쉬기조차 힘들어지게 되었다.

바로 이 스트레스를 불교나 도교 등을 통해 어느 정도 해소해 나갈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깊은 산속에 은거하거나 강호를 떠돌며 시(詩)나 읊조리는 길밖에 없었다. 그래서 반사회적이고 반정치적인 수많은 은사(隱士)와 기인(奇人)들이 생겨났던 것이다. 중국에서 무협 문화가 번성하게 된 데에는 아마 이런 문화적 배경이 큰 역할을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유교(제도권)의 경계를 멋대로 넘나들 수 있는 것은 무협(武俠)밖에 없었으니.

동양이 ´우리(집단)´가 아닌 ´나(개인)´에 눈뜨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제국주의 물결을 타고 온 서양의 과학 문명 덕분이었다. 당연히 그 선봉은 천주교 선교사들이었다.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새롭게 정제된 자유, 평등, 박애를 여기저기 뿌려대자 수천 년을 버텨 오던 구들장들이 들썩이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천지개벽이 나고 만 것이다.

서양의 개인주의는 결코 우리들이 이해하는 이기주의와 완전히 같지 않다. 물론 이기주의가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집단적인 문화 정신에서 개인주의는 이기주의보다 훨씬 광범위한 내함이 있다. 그것은 물질에 의한 욕망의 만족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 개인의 의지와 개성의 자유, 그리고 이러한 물질과 정신상의 자아실현을 위해 진행되는 갖가지 자유로운 진취와 추구, 즉 개인의 분투를 포함한다. 이러한 개인주의의 사회 관념과 그 개인의 추구가 실현되는 때에 얻게 되는 객관적 이익의 유혹이 개인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노력하게 하는 동력인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전체 사회의 물질문화와 정신문화가 끊이지 않고 창조되는 것이다.

만약 이 ´개인´이라는 신약(新藥)을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냈더라면, 이 땅에서 나오는 재료로 만들었더라면 우리 몸에 잘 맞았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심한 가치관의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은 분명 이 신약의 부작용 때문일 것이다. ´개인´의 편리함만 받아들였지 그 덕(철학, 정신)은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즉 개인주의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편협한 이기주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렇지만 그 약은 원래 좋은 약이고, 꼭 필요한 것이다. 문제는 우리의 체질(심성, 도덕규범)이다. ´우리´는 분명 집단주의의 민족이었다. 체질을 바꾸든지, 아니면 우리 체질에 맞는 같은 효과의 신약을 만들든지 해야 한다. 옛것이라 하여 무조건 내다버린 덕을 새롭게 가공해내야 한다. 계몽을 하든, 개혁을 하든 없어서는 안 되는 재료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무덕(武德)´이다.

비록 스스로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분명 우리에게는 ‘천박한’ 그 무엇이 내재하고 있다. 편협한 민족주의를 넘어 성숙된 국가주의로 나가려면 기필코 이것들을 떨어내야 한다. 그것이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이다. 반드시 우리 세대가 해내야 할 일이다.

<이 글은 인터넷 신문 데일리안에 연재중인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