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기보존회 언론중재위원회 제소건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4-07-23 조회수 : 263

 

 

24기보존회 언론중재위원회 제소건

 

[제소된 데일리안 기사]

http://www.dailian.co.kr/news/news_view.htm?id=192478&sc=naver&kind=menu_code&keys=4

 

http://www.dailian.co.kr/news/news_view.htm?id=193269&sc=naver&kind=menu_code&keys=25

 

 

 

 

 

2010218, <데일리안>에 실린 신성대의 기사에 대해 ()무예24기보존회에서 명예훼손 등의 이유로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하여 3억원의 피해보상을 요구하였습니다.

이 글은 그 제소 내용에 대한 데일리안의 반박문입니다.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출한 것입니다만, 무예도보통지를 둘러싼 여러 가지 주장과 오해를 불식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심의결과]

본 반박문은 심의 하루 전 신청인 측에 전달되었으며, 심의에서 위원장은 신청인에게 피신청인의 반론문에 대해 재반론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만, 신청인 김영호는 재반론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언론의 형평성을 고려하여 신청인 24기보존회 측에게도 <데일리안>3회의 반박기고문을 실을 기회를 제공할 것과 문제 칼럼의 지나친 표현(내용이 아님)에 대해서 유감을 표하는 것을 합의서에 명시하는 것으로 위 사건의 심의를 마쳤습니다.

 

 

 

 

 

 

 

 

언론중재신청에 대한 피신청인의 반론문

데일리안 편집국장

(데일리안 경기 논설위원 신성대 대표작성)

 

 

 

1. 무예24기보존회의 명칭에 대한 주장

 

신청인 ()무예24기보존회는 무예도보통지무예의 올바른 명칭이 십팔기가 아니라는 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1-1 십팔기를 최초로 정립한 사도세자의 문집인 <능허관만고凌虛關漫稿>예보육기연성십팔반설(藝譜六技演成十八般說)에서 십팔기가 아닌 십팔반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이는 ()무예24기보존회의 학술연구가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예보육기연성십팔반설을 실제로 읽어보면, ‘이로부터 십팔기라는 명칭이 생겼다(自是始有十八技之稱, <능허관만고> 722)’라고 명시하고 있다.(별첨1,2)

일반적으로 십팔반은 열여덟가지를 뜻하는 수사(數詞)이다. 제목만을 보고 사도세자는 <무예신보의 무예를 십팔반이라고 했다고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글의 제목은 무예제보의 여섯 가지 기예가 세월이 흘러 열여덟가지를 이루었다로 해석되고, 본문에서는 그 열여덟가지 무예를 십팔기라고 명확히 이름하고 있다.

 

 

1-2 무예도보통지서문과, 국조보감》《만기요람등에도 ‘24로 명명하고 있다?

 

무예도보통지의 서문에는 현륭원(顯隆園, 사도세자)의 뜻에 따라서 십팔기의 명칭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짐이 외람되이 무의식(武儀式)의 전형(典刑)을 이었으며 또 마상기예[騎藝] 6기를 다시 늘여서 이십사기(二十四技)가 되었을 뿐이다.(顯隆園志而十八技之名始此 肆予繩武儀式典刑又以騎藝等六技復增爲二十四技而已)’라고 되어있다.

 

위의 글에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의지로 십팔기가 무의식의 전형이 되었으며, 자신은 여기에 마상기예 6가지를 늘려 24가지로 책을 편찬하였을 뿐임을 강조하고 있다.

 

‘24라는 말은 무예도보통지라는 책을 언급할 때에, 이 책이 24가지 항목으로 되어 있다는 뜻으로만 쓰였다. 신청인이 언급한 국조보감》《만기요람모두 마찬가지로무예도보통지의 편찬에 관한 것일 뿐 무예24가 정식명칭이라는 증거는 될 수 없다.(별첨3)

 

오히려 정조는 무예도보통지편찬 이후에 십팔기라는 용어를 십팔기교관’ ‘십팔기군과 같이 일성록과 병서 등에서 더욱 일관되게 사용하고 있다. 그 이후 조선말기는 물론 해방 후에도 십팔기는 십팔기터 등의 다양하고 풍부한 용례를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봉고미원이 일반적인 승합차와 조미료를 통칭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십팔기는 무예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그 의미가 확장되어 쓰였다. 이러한 사실은 별첨된 자료를 참고하기 바란다.(별첨4,5,6)

 

 

1-3 현재 학계와 사전 등에서는 모두 무예이십사기, 이십사반무예, 무예이십사반이라고 부르고 있다?

 

조선이 멸망하고 36년간의 일제시기를 거친 후, 우리무예에 대한 관심과 지식은 거의 바닥에 떨어져있었다. 무예도보통지에 대한 대대적인 관심은 1990년대 이후에 일어난 것이었다. 신청인은 조선시대의 역사자료가 아닌, 비교적 최근에 있었던 몇몇 학자 또는 사전편찬자들의 작업을 근거로 삼아 조선시대의 일을 논하고 있는 매우 초보적인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특히 무예이십사기, 이십사반무예, 무예이십사반 등의 명칭은 무예도보통지가 편찬된 조선시대 자료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 신조어일 뿐이다. 다만 고유명사가 아닌 수사로서 사용된 ‘24만이 몇 개의 자료에서 보일 뿐이다.

 

 

1-4 <조선후기 공식무예의 명칭 십팔기에 관한 연구>의 내용이 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한 논문이 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그 논문을 반박하는 논문이 발표되고 이를 적절하게 방어하지 못했을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논문을 반박하는 논문은 아직까지 한 번도 발표된 적이 없다.(별첨7) 오히려 이 논문이 발표된 뒤에 국가공영방송인 KBSEBS에서는 십팔기라는 명칭을 일관되게 사용하고 있다.(별첨8 동영상 참고)

 

 

1-5 출판, 신문 기사 및 방송 등 객관적인 자료에 표현된 명칭?

 

그동안 대한십팔기협회와 십팔기보존회가 함께 해온 작업들과 그에 관련한 기사와 방송 자료를 CD에 담았다. 그렇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24란 명칭을 사용한 적이 없다.

 

십팔기보존회와 ()무예24기보존회가 공동 출연한 KBS TV<한국사전 - 정조대왕>과 역시 최근 방영된 KBS TV<느티나무 - 무예도보통지>에서도 ‘24란 명칭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으며, 오직 십팔기라는 명칭만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공영방송인 KBS에서도 조선 국기의 명칭이 ‘24가 아니라 십팔기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예일 것이다.(별첨8 동영상 참고)

 

2005730, 조선일보 21, 한양대학교 정민 교수가 쓴 <18C의 바보들 - 무예도보통지>에서도 십팔기의 명칭을 사용하였다.(별첨10)

 

이화여대출판부에서 펴낸 한국의 전통무예, 십팔기(2008, 최복규 지음)에서도 이를 증명하고 있다.(별첨책자)

 

3건은 모두 어느 한쪽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따르지 않은 객관성 있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외에도 무예도보통지무예24는 장용영 외영을 중심으로 전국에 보급되었기 때문에 수원화성에 지역적 연고를 두고 있다고 했는데, 장용영 외영은 1793년에 설립되었고 1801년에 혁파되었으므로 약 9년 동안만 존재했던 군영이다.

무예도보통지(1790)가 편찬되기까지는 임진왜란 당시에 편찬된 무예제보(1598)로부터 약 200년간의 세월이 필요했다. 이후 조선군대가 해체될 때까지 군사들의 무예는 무예도보통지의 십팔기를 기준으로 삼았으며, 훈련도감의 교관들이 전국의 지방군에 파견되어 무예를 가르쳤다.

 

그런데 단 9년 동안 존재했던 장용영 외영이 조선후기 무예의 모든 역사를 대표하는 것처럼 내세우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교묘하게 조작하여 아전인수로 해석한 것이다.

 

 

2. 급조된 명칭 ‘24무예24기보존회’?

 

<데일리안>경기판 논설위원이자 출판인으로서 전통무예연구가인 신성대는 40년 동안 무예계를 지켜오면서 그의 스승이자 십팔기의 유일한 전승자인 김광석 선생과 민속학자이자 오랫동안 무형문화재 전문위원으로 활동했던 심우성 선생을 도와 우리나라에 십팔기와 전통무예를 중흥시킨 선구자이다. 함께 제출한 각종 출판물과 신문 및 방송 뉴스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그리고 아직 전통무예계에서 이만한 성과물을 이뤄낸 단체나 사람은 없다.(첨부책자 및 관련기사 참조)

 

이에 비해 신청인 ()무예24기보존회는 자신들의 주장과 실기를 객관적으로 검증받을만한 단 한권의 어떤 실적물도 내놓은바 없다. 단지 대한십팔기협회 및 십팔기보존회의 업적을 바탕으로 수원 화성에서 전통무예 공연으로 관광활성화에 이바지한 것 밖에는 인정할만한 것이 없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 단체는 ()무예24기보존회 말고도 전국적으로 여러 단체가 활동 중이다.

 

이번 신청시 제출한 김준혁의 <조선 정조대 장용영 연구>(별첨책자)란 논문도 무예도보통지의 무예 실기 연구와는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는 자료이다. 공연 장면을 찍은 홍보용 혹은 신문기사 사진과 단편적인 홍보영상 및 자신들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기술한 논문만으로 전통무예 공연단체의 무형문화재 지정 심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누구라도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1970103일 우리나라 최초로 십팔기도장을 개설한 해범 김광석 선생이 40년째 활동해오고 있는 대한십팔기협회나 23년 째 활동해온 십팔기보존회 때문에 십팔기의 대안으로 ‘24란 명칭을 차용해온 것으로 빈약한, 그리고 초기 미흡한 연구가들의 논문을 그 증거로 제시하며, 자신들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있다. 신청인이 제출한 조정신청서와 자료가 이를 반증하고 있다. ‘()무예24기보존회는 20054월에 경기도에 의해 비영리법인으로 허가된 단체라는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이에 비해 대한십팔기협회는 1981년 등록된 사회단체이다.(별첨9) 그리고 십팔기보존회는 1987 민속학자 심우성 선생과 김광석 선생이 공동으로 무예도보통지 실기해제(별첨책자)를 펴내면서 결성되었고, 2002개천절날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해범김광석 한국무예발표회를 계기로 본격적인 십팔기 보급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3년여에 걸쳐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약 90여회의 무예 십팔기 공연을 가졌다.(별첨11)

 

이를 계기로 전국적인 전통무예 붐이 일어났으며, 십팔기보존회를 모방한 유사단체들이 우후죽순 생겨난 것이다. 이런 상황은 당시 함께 했던 문화재전문위원 심우성 선생의 글에도 잘 묘사되어 있다.

그 연원이 불분명한 온갖 전통무예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는 작금의 우리 무예계이지만, 한국 무예의 종가로서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굳건하게 십팔기를 지켜나가고 있는 해범 문중이 있어 민족 정기를 바로 세우는 데 커다란 받침목이 되고 있다.

200612월 심우성 씀(박청정 지음 무예도보통지주해서문에서)(별첨책자)

 

아무튼 그들의 스승인 임동규 선생도 말했듯이(별첨20) ()무예24기보존회가 등록된 20054월 이전에는 대한민국 어디에서도 ‘24를 연마했다는 개인이나 단체가 존재했던 적이 없었다. 이로 보아 수원화성문화사업단이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행해지던 십팔기보존회의 무예시연을 모방하여 갑작스럽게 이와 유사한 형태의 관광상품을 개발한 것으로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왜냐하면 2002103일부터 시작된 십팔기보존회의 활동은 이미 신문과 방송을 통해 널리 알려져 각광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별첨자료)

 

참고로 40년 동안 십팔기를 익히고 전승 보급해온 해범 김광석 선생과 십팔기보존회는 아직 십팔기를 무형문화재로 지정해줄 것을 신청한 적이 없다. 첨부한 참고자료로부터 알 수 있듯이 전통무예 십팔기와 그 교본인 무예도보통지에 관한 연구와 보급 활동이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선구적인 업적임에도 불구하고, 십팔기가 특정단체의 것이기보다는 대한민국인 모두의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십팔기가 전승자인 해범 김광석 선생의 것이기에 앞서 조선 왕조에서 만든 나라의 무예, 즉 국기였기 때문이다.

 

 

3. ‘24반무예무예24’?

 

현재 무예도보통지를 텍스트로 삼아 전통무예를 복원했다고 주장하는 주요 단체로 ()무예24기보존회와 ()24반무예협회가 있다. ()24반무예협회는 80년대 후반 민족도장 경당을 차린 임동규 선생이 만든 단체이다. (별첨12 한겨레)

 

1979년 통혁당 재건 기도 및 남민전 사건으로 10년간 옥고를 치렀던 임동규 선생은 감옥에서 빗자루로 검법을 익혔다고 한다. 출소 후 그는 경당을 열어 고구려 무예를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자신도 십팔기를 익혔다고 했으나, 이미 대한십팔기협회에서 예전부터 십팔기를 가르치고 있어, 그 대안으로 십팔기의 별칭인 ‘18반무예를 사용하였다.(별첨13 경향신문 2003.12.07)

 

()무예24기보존회 중앙전수원장 김영호는 1990년에 고구려 무예 경당을 전파하던 임동규의 제자가 되어 ‘24반무예를 배웠다고 했다.(별첨14 수원 뉴시스) 수석사범인 최형국 역시 1994수원대학교 검도부에서 활동하다가 경당을 들락거리며 24반무예를 만나게 되었다고 했다.(별첨15 경향신문 2003.02.13)

 

2001512일 경기도 문예회관 국제회의장에서 개최한 수원 화성과 24반 무예란 주제로 학술 세미나를 개최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24반무예협회가 수원의 정조시대 전통무예전에 참가하게 된다. 이때 김영호와 최형국도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임동규 선생을 따라 화성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별첨16)

 

그러나 2001, 임동규 선생이 당국의 허가도 없이 방북하였다가 다시 감옥에 들어가는 바람에 화성의 무예공연사업은 그의 제자인 김영호와 최형국이 주도하게 된다. 나중에 임동규 선생이 출옥했을 때 사업의 주도권은 이미 김영호에게로 넘어간 상태였고 이를 계기로 내분이 생기게 된다.(별첨18) ()24반무예협회를 수원 화성에서 내쫓은 김영호와 최형국은 새로운 단체인 ()무예24기보존회를 만들어 독자적으로 회원을 모집하게 된다.(별첨19)

 

2004424, 두 제자로부터 배신을 당한 임동규 선생은 <민족도장 경당인들의 단결을 촉구하는 글>에서 무예24’ ‘무예24기보존회가 이전에는 없었으며 갑자기 만들어진 것임을 규탄하고 있다.(별첨20) 또한 화성공연 이권을 둘러싼 내부 분란에서도 이러한 과정이 잘 나타나 있다.(별첨22)

 

이처럼 고구려 무예 경당’ ‘18반무예‘24반무예, 그리고 무예24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원화성운영재단은 이를 전혀 문제 삼지 않고 이후 ()무예24기보존회를 지속적으로 지원하였다. 20054()무예24기보존회가 등록되었다.

 

2005년에는 ()24반무예경당협회라는 단체명으로 활동하던 임동규 선생은 ‘24반무예라는 명칭으로 국가중요무형문화재를 지정받으려고 문화재청에 신청하였으나 전승이 아닌 복원이라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똑같은 기예를 바로 그 제자가 이름을 바꾸어 이번에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으려 시도했으니 부결되는 것은 당연지사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경계하는 글을 쓰는 것은 언론인의 책무일 것이다.

 

이로 미루어보아 이번에 신청인이 경기도 무형문화재 지정을 받으려고 한 무예는 그 명칭에서부터 전래의 고유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 무예’ ‘18반무예’ ‘24반무예’ ‘무예24라는 명칭으로 이는 자신들의 편의상 임의적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신청인과 그 관계자들이 추진하였던 경기도 무형문화재 지정신청이 전문위원들의 조사에 의해 이같이 문제점이 드러나 부결되었음이 자명한데도 불구하고, 그 책임을 피신청자에게 돌리고 있다.

 

위와 같은 사실로 보아 이들 단체가 그저 단순히 체육 혹은 문화관광산업 단체로서 활동하는 것이라면 문제 삼을 일이 아니지만,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으려고 일을 도모했다는 것은 부적절한 처사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사실을 알고도 지원한 수원화성운영재단의 관리 소홀이며, 성과주의에 급급한 나머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데에 동참하여 행정력을 낭비하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사정이 이러함에 피신청인인 신성대가 ‘24와 그 단체를 급조되었다고 표현하는는 것은 무리가 아니라고 본다.

 

 

4. 기예에 관한 ()무예24기보존회의 입장

 

우선 제출한 참고자료에서 보듯 십팔기보존회의 그 역사와 전승, 그리고 수십 년에 걸친 공부는 함께 제출한 그 성과물이 대변하고 있다. ()무예24기보존회의 십팔기보존회의 기예에 대한 비판은 무예의 본질을 제대로 꿰뚫지 못한데서 온 것이다. 십팔기보존회 회원들이나 지도자들이 원고의 주장대로 뭘 몰라서, 할 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님을 먼저 밝혀두고 답변에 들어간다.

 

 

4-1 장창의 길이, 무게?

 

현재 여러 한국의 여러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무기들 중 무게, 길이, 모양이 똑같은 무기는 하나도 없다. 이는 같은 무기라도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다 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병장기는 당시의 표준사양을 제시한 것이다.

 

십팔기보존회가 그걸 몰라서 짧은 단창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현실적으로 실내에서 무예를 익히다보니 공간적인 제약 때문에 단창을 사용할 뿐이다. 공간이 허락하면 장창을 사용하기도 한다. 무기의 길이를 두고 그 무예가 맞니 틀리니 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주장이다. 문제는 그 기예가 정확하냐 하는 것이다.

 

진검으로 하느냐, 가검으로 하느냐는 시비 또한 기예의 본질과는 먼 주제이다. 공연마당의 많은 관객들 앞에서 벌어지는 격렬한 무예시연은 시연자는 물론 관객에게도 위험의 소지가 많다. 실제 진검()을 사용한 초창기 공연에서 십팔기보존회는 2004년 설날 용인 에버랜드 공연에서 창날이 부러져 관객이 다치는 사고를 겪었었다. 이후 모든 무기를 날을 세우지 않은 질기고 가벼운 재질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다. 검도 시합을 왜 진검으로 하지 않고 죽도로 하느냐고 따지는 것과 같은 트집일 뿐이다.

 

과거에는 무예를 전쟁에서 살상을 목적으로 익히긴 하지만, 현대에는 건강, 때로는 시연을 목적으로 익힌다. 따라서 굳이 위험하거나 무거운 무기를 사용하지 않아도 무방하다고 본다. 회원들이 굳이 진검을 가지려면 도검류 신고 절차를 거쳐야 하는 등 번거로운 일이 뒤따른다. 또한 공연 시에는 관객에게 보다 멋있고 활달한 기예를 보여주기 위해 가벼운 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두고 트집을 잡는 것은 지나치다.

 

 

4-2 24기보존회의 기예는 검도식으로 왜색풍이 짙다?

 

()무예24기보존회가 만들어질 때부터 주도적으로 이끈 사람은 김영호와 수석사범인 최형국 두 사람이다. 이 중 김영호는 자신의 무예를 내보인 적이 거의 없고, 대개 최형국을 통해 시연과 훈련을 했다고 본다. 그들의 스승인 임동규 선생 역시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 검도류를 익힌 인연으로 무예도보통지의 검법을 혼자서 터득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무예24기보존회 중앙전수원장 김영호는 임동규 선생 한테서 ‘24반무예를 배웠다고 했다.(별첨16) 또 수석사범인 최형국 역시 경당을 들락거리며 24반무예를 만나게 되었다고 말했다.(별첨15)

 

시연단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온 최형국은 스스로 검도를 배웠다고 수차례 자랑했으며(별첨17) 자신의 말대로 그의 동작은 누가 보아도 검도를 토대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지도를 받는 다른 단원들의 기예도 별반 이와 다르지 않다. 이로 인해 ()24기보존회의 검법은 대부분 검도식이라고 본다.

 

그리고 초창기에 선보이지 못했던 월도 등은 십팔기보존회의 동작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또한 이 신청서에서 십팔기보존회가 소림사를 본떠 대련(교전)을 한다고 근거없는 주장을 하면서, 현재의 ()무예24기보존회 역시 초창기에는 한 가지도 선보이지 못하던 각종 교전을 시연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예도보통지에도 나오지 않는 그것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의문이다.

 

 

4-3 십팔기보존회는 16가지만 익히고, 24기보존회는 24가지를 익힌다?

 

대한십팔기협회와 십팔기보존회에서도 24기를 모두 다 익힌다. 단지 예전에는 한국에서 말을 탄다는 것이 아무에게나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저술을 할 적에 기예(騎藝)4기와 왜검을 고의로 뺀 적도 없다. 다만 왜검과 교전은 격검 위주로 너무 단순하고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검법으로 굳이 별도의 해설이 필요 없어무예도보통지의 있는 그대로를 실었을 뿐이다.

 

또한 단순한 만큼 현대인들이 익히는 재미가 덜한데다, 관객을 상대로 공연할 때에는 시간의 제약과 관객의 흥미유발 때문에 미처 선보일 기회가 없어서 시연을 안 한 것뿐이다. 그렇지만 일부 경제적 여유가 있는 십팔기보존회 회원들은 기예(마상무예)와 마상 활쏘기도 익히고 있다. 이는 전적으로 회원 개인적인 기호와 경제적 사정에 따른 것이지 고의로, 혹은 재현 할 줄 몰라서 안 가르친 것이 아니다.

 

그렇다 해도 명칭은 언제나 십팔기를 사용하고 있다. 마상재와 격구는 무예는 아니지만 군사체육으로서 무예도보통지에 부록한 것이고, 마상무예인 기예(騎藝)4기는 십팔기의 응용종목이다. 따라서 말을 타든, 소를 타든, 수레를 타든 십팔기를 가지고 하는 것은 언제나 십팔기여야 한다.

 

4-4 십팔기는 쿵푸(중국무술)풍이다?

 

십팔기에는 임란 때 명나라 척계광의 기효신서에 실린 7가지 무예와 숙종 때 일본에서 들여온 왜검과 교전이 있다. 이중 왜검과 교전은 지금의 검도와 유사한 격검(막고 치는 식의 단순한 동작)으로 되어 있어 별도의 전승이 없이도 현대 일본 검도를 익힌 사람이라도 책을 보고 쉽게 따라할 수 있다.

 

하지만 나머지 조선 전래의 기예라 해도 당시 중국과의 문화교류로 인해 상당부분 중국무예와 유사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반대로 예도(조선세법)처럼 조선의 전래 검법이 중국으로 전해져 크게 영향을 끼친 경우도 있어, 십팔기와 중국무술의 차이를 분별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일반인들이나 수준 높지 않은 무예인들이 십팔기보존회의 동작을 보고 쿵후(중국무술)를 닮았다 해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니라 할 수 있겠다.

십팔기에는 한 개의 권법을 제외하면 모두 창, , 월도, 본국검, 예도 등 다양한 병장기를 다루는 무예이다. 따라서 십팔기를 익힌 사범 정도의 수준이면 중국무술 뿐 아니라 검도 등 거의 모든 무예를 금방 따라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같은 무기를 다루는 기술이면 중국인이나 한국인이 크게 다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십팔기 전승자인 해범 김광석 선생도 70년 처음으로 십팔기도장을 열었지만, 아무도 십팔기를 우리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을 뿐더러 우리 것이면 오히려 멀리 하고 배우려하지 않았었다. 해서 70년대 내내 중국권법(쿵후)을 가르친 적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어렸을 적부터 익힌 십팔기가 중국무술로 변한다는 생각은 무학의 부족에서 나온 어리석은 생각이다. 이는 동의보감에 중국한의학의 냄새가 짙다고 트집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한 쿵푸로서 십팔기를 복원했다고 하는 주장도 무예 상식이 없는 무리한 주장이다. 다만 중국무술 등에 대한 지식이 십팔기를 보다 수준 높게 구현하는데 도움이 되었음은 사실이다. 참고로 십팔기 회원들 중에도 십팔기를 배우기 전에 다른 무술을 익힌 사람도 있으며, 반대로 십팔기를 배운 바탕으로 그 후 다른 무예를 전공하는 회원들도 많다. 모두 각자의 기호와 사정에 따라 선택이 달라질 뿐이다.

 

바로 이 때문에 십팔기를 중국무술의 변형이라고 비판하고 있는데, 이는 무예에 대한 지식의 부족에서 나온 발상이다. 우리가 학교에 가서 국어만 배우는 것이 아니다. 국사를 전공한다고 중국사, 일본사, 세계사 공부해선 안 된다는 발상과 같은 좁은 소견이다. 축구를 한다고 곧바로 공만 차는 것이 아니며, 수영한다고 물에서만 노는 것이 아니고, 그 운동에 도움이 되는 여러 가지 다른 체력훈련법이나 다른 나라의 기술 등을 배울 수 있는 법이다.

 

당연히 무예 수련에서도 비록 십팔기를 하지만 다른 무예나 다른 체육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결코 십팔기의 본질을 망가트리는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는 트집 잡을 일이 아니라 오히려 권장할 일이다. 그렇지만 ()무예24기보존회 공연단의 기예 중에 일본 검도의 요소가 십팔기(24)를 구현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십팔기의 원형을 수준 낮게 훼손시키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선도적 연구자의 입장에서 지적코자 하는 것이다.

 

또한 십팔기보존회의 월도장창대련(교전) 시연을 보고 중국소림사의 기예를 모방했다고 하는 것 역시 무예를 보는 눈이 낮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는 중국소림사가 아니라, 무당파, 혹은 일본 사람들이 해도 장창과 월도가 약속된 동작으로 겨루면 각자 전혀 별다른 동작이 나오는 게 아니고, 서로 비슷할 수밖에 없다. 엄숙하면 일본 검도, 화려하고 능숙하면 중국무술, 이도저도 아니면서 뒤뚱거리면 한국무술이라는 잘못된 인식이 바탕에 깔려있는 질문이다. 같은 기예도 수련자의 수준과 개성에 따라 각기 다른 풍의 시연이 펼쳐지는 것이다.

 

또한 일반회원들의 수련이 아닌 관객들을 즐겁게 해야 하는 무대에서의 공연은 보다 재미있게 응용하여 펼칠 수 있는 것이지, 오히려 그러지 못하는 것이 아직 무예수준이 모자람을 의미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학구적인 세미나나 발표회 등 그 성격에 따라서 원보에 충실한 기예를 구분해서 선보이고 있다. 전승 복원시킨 기예 동작은 이미 책을 통해 모두 정리하여 공개했었다. 그럼에도 이를 무시하고 공연 때의 기예만을 보고 원보와 똑같지 않다고 트집 잡는 것은 지극히 유아적인 발상이다.

 

 

4-5 십팔기보존회에선 한 손으로 검법을 익힌다?

 

이 역시 상식 이하의 질문이다. 칼이 무거우면 당연히 두 손으로 다뤄야 할 것이며, 가벼운 것을 굳이 두 손으로 다룬다면 변화에 불편하고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다. 그때그때 상황과 칼의 무게, 길이, 상대의 무기나 무장 정도에 따라 두 손 혹은 한 손을 사용하는 것이 더 옳은 일이다. 무예 용어로는 이를 배수법(配手法)이라 한다.

 

무예도보통지는 일반 병졸들의 기초적인 무예를 정리한 교본이다. 따라서 처음에는 두 손으로 힘 있게 순서를 익히는 것이 맞다. 십팔기보존회에서도 무조건 모두 한 손으로 익히는 것이 아니라, 초보자에게는 원보대로 두 손으로 훈련시킨다. 그러다가 숙달되고 힘이 생기면 한 손 혹은 두 손으로 자유자재로 검을 다루게 된다.

 

10, 혹은 20년 이상 숙달된 십팔기보존회원들의 시연 모습을 보고무예도보통지의 그림과는 달리 한 손으로 하니까 틀렸다거나, 같은 기예를 능숙하게 변화 응용하여 펼치는 화려한 개인기를 보고 중국소림사 무술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그만큼 ()무예24기보존회의 인사들이 무예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말이다.

 

 

5. 보도로 인한 피해사항?

 

5-1 <데일리안>경기판에 올린 신성대의 논설이 24기보존회 경기도무형문화재 최종심의에 영향을 끼쳐 부결을 유도하였다?

신성대 논설위원은 2월 초에 ()무예24기보존회가 경기도 무형문화재 지정신청 하였으며 전문위원들에 의해 사전조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218일에 그 최종 심의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이의제기민원과 참고자료는 22일 경기도청 문화재과 접수, 별첨22) 다만 그동안 행해진 무형문화재지정의 사례에 비추어 볼 때, 이번 안건의 처리 과정에 문제가 많음을 알고 이를 경계코자 했을 따름이다. 만약 그 당일에 최종심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글을 올리지 않았거나 그 내용을 달리 했을 것이다.

<데일리안>경기판에 신성대의 글이 올라간 시간은 2010218, 1153분이다. 심의는 당일 15시였다고 신청인이 주장했다. 원고 측의 주장대로라면 심사위원들이 이 심의에 참석하기 직전인 점심식사 중 또는 심의 장소로 가는 도중 차안에서 인터넷을 통해 그 기사를 찾아서 읽었다는 주장인데 이는 원고의 주장일 뿐 개연성이 없다고 본다.

 

설사 신청인의 주장대로 사전에 심사위원들이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위 기사를 애써 찾아 읽었다 하더라도 이로 인한 심리적 부담을 받아 안건을 부결을 시켰다는 주장은 황당하기 짝이 없는 억지이다. 무형문화재 심의절차는 사전에 위임받은 수 명의 관련학계 전문가들에 의해 작성된 조사보고서를 토대로 최종적으로 그 가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신청인의 주장대로라면 사전조사보고서가 모두 긍정적으로 평가되어 가결이 거의 확정적이었다가 최종심의 직전에 올라간 한 인터넷신문 지방판 기사의 협박(?)에 흔들려서 판단을 그르쳤다는 것인데, 이는 심사위원들의 양심과 학문적 자질을 낮춰보는 지나친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정히 그렇다면 신청인의 주장을 입증해줄 전문위원들의 사전조사보고서의 내용을 공개해야 할 것이다.

 

만약, 신청인의 주장대로 심사위원들이 신성대의 글과 박청정의 논문을 사전에 읽고 최종심의에 들어가 심사에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면, 이는 곧 위 두 사람의 주장이 옳았다는 반증이 아닌가. 그동안 잘못 알고 있었던 새로운 사실을 알고 그걸 최종심의에 반영했다는 것이 되니 이는 오히려 바람직하고 당연한 결정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는 또한 역으로 ()무예24기보존회 무형문화재 지정신청이 타당치 못한 일임을 증명했다고 볼 수도 있다.

 

 

5-2 신청인을 도와 준 시와 도를 비롯한 관계자들의 정신적 피해?

 

218일의 정황으로 보아 이번 안건은 사전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최종심사위원들이 공정하게 심사했음이 틀림없다고 본다. 그리하여 이번 일로 심사위원들은 물론 신청인을 도와 준 시와 도를 비롯한 관계자들이 그동안 ()무예24기보존회의 일방적인 주장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니, 이번 사안은 오히려 진실을 보도한 언론의 본분에 충실했음을 증명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신청인은 언론중재신청서에서 신청인을 도와 준 시와 도를 비롯한 관계자들의 정신적 피해란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는 곧 시와 도 담당공무원들과 신청인이 사이에 암묵적인 사전 협의가 도출된 상태에서 행정 절차를 진행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하고 있어, 피신청인 신성대의 문제제기가 결코 과민한 것이 아니었음의 반증한 것이라 볼 수도 있다.

 

그동안 피신청인 신성대를 비롯한 무예연구자들이 <데일리안>을 통해 화성의 공연무예 ‘24에 대해 전술한 여러 가지 문제점을 누누이 지적해 왔으며, 관계자들에게 관련 자료를 보내기도 했었다. 하지만 신청인은 물론 신청인을 도와 준 시와 도를 비롯한 관계자들 은 단 한 번도 이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거나 그 진의를 파악하려는 시도를 한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귀 닫고 있을 때, 이번 심사에 참여한 전문위원 및 심사위원들은 이러한 사실들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이번 안건을 부결시켰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일이다.

 

 

5-3 ‘24’, 십팔기의 모방?

 

십팔기보존회의 업적은 이미 수많은 실적물(출판물)을 통해 검증이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무예24기보존회는 자신의 기예를 객관적으로 내보여 검증받을 수 있는 실적물을 내놓은 적이 없다. 오직 공연하는 것으로만 자신의 동작이 더 무예도보통지에 부합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이는 결코 인정받을 수 없는 부분이다.

 

명칭에 대한 왜곡은 이미 논문을 통해 지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반박 논문 하나 내놓지 못하고 있으며, 모방논란 역시 자신의 기예를 출판물 등 객관적인 자료 형태로 공개해놓고 십팔기보존회의 그것과 다르다고 주장해야지, 그저 말로만 다르다고 하니 이를 당장 객관적으로 증명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오래 전에 기예를 세상에 공개한 십팔기인들이 볼 적에 ()무예24기보존회 공연의 상당 부분이 십팔기의 그것을 따라하고 있음을 당연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이 문제는 ()무예24기보존회가 자신들의 기예를 책으로 공표를 하던지, 아니면 공동으로 학회나 세미나를 가져서 서로 비교해보면 금방 밝혀질 일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언론중재위원회에서 판단할 사안은 아니라고 보지만, 우선 책이란 실적물이 발간된 연도만을 비교해서라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문제라고 본다.

 

()무예24기보존회가 객관적으로 평가받을만한, 그래서 비교가능한 실적물도 하나 내놓지도 못하면서, 모방이 아니라고 주장을 하니 어쩔 수 없이 실기 동작을 보고 평가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예24기보존회 공연 초창기에는 전혀 선보이지도 못하던 기예를 하나씩 늘려가면서 재현해내고 있고, 전에 못 보던 대련(교전)도 지금은 여러 가지 선보이고 있다. 십팔기보존회 측에서 볼 때 그러한 종목들이 대부분 모방 혹은 미숙한 것으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활동하기 훨씬 이전에 이미 책과 공연을 통해 누구나 그렇게 따라 할 수 있도록 다 공개해놓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선보인지 오래되지 않은 ()무예24기보존회의 <월도>공연에서 오관참장세의 동작은 무예도보통지책을 보고 복원한다면 사람마다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예24기보존회에서는 십팔기보존회에서 행하고 있는 동작을 똑같이 취하고 있다. ()무예24기보존회의 수석사범인 최형국은 2003년 격월간지 <마르스>(17)와의 인터뷰에서 스스로 대한십팔기협회의 시연 비디오를 보고 <쌍검>을 익혔음을 고백한 바 있다.(별첨21)

 

 

5-4 좌파정권 개혁코드 운운?

 

흔히들 지난 10년을 좌파정권이라 부른다. 우리 사회에서 이 표현은 진보의 다른 의미이지, 반드시 좌익이나 사상적으로 친북을 뜻하지 않음으로 인식된 지 이미 오래되었다. 좌파란 표현의 색깔론으로 엄청난 피해르 보았다고 과장하는 것은 지나친 반응으로 본다.

 

지난 정권시절 유홍준 문화재청장을 필두로 한 정조대왕 띄우기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정조대왕의 최대 업적으로 꼽히는 수원 화성과 장용영, 그리고 무예도보통지의 무예로 인해 수원 화성과 그 관련 사업이 주목을 받고 전에 없이 많은 지원을 받은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이를 짐작케 하는 기사가 20041228() 수원일보에 17대 국회의원인 심재덕 의원 인터뷰를 통해 엿볼 수 있다.(별첨23)

 

지금은 하늘이 준 기회다. 나는 누가 뭐라 해도 노무현이라는 사람을 생각해서 행동할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가 수원의 발전이다. 고속철도 화성역 유치와 화성 성역화 사업이 목표다. 화성 성역화 사업은 문화재청장 및 청와대와 교감을 가졌다. 화성을 세계적인 관광지로, 한국인의 정체성을 극명하게 나타내주는 역사적 현장으로 보호하는 것이다.”화성 성역화와 지방자치 발전, 심재덕 의원의 주요 정치 코드는 이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그리고 20054()무예24기보존회가 등록되었다. 무예24기 불모지였던 수원에 들어와 첫 발을 내딛고 그 역사성과 정체성을 심어낸(별첨24) ()무예24기보존회가 이 기간 동안에 급작스레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을 것임은 능히 짐작하고 남을 일이다.

 

이 같은 일련의 정황으로 보아 화성성역화 작업의 일환으로 전통무예 공연사업 또한 전폭적으로 지원받았을 것임을 능히 짐작할 수 있으며, 충분한 내용 검증 없이 성과주의에 급급하여 공연 사업이 진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다소 거친 표현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바로 그 때문에 문화재 지정심사가 부결되었다고 볼 수는 없으며, 비도덕적인 단체로 비하했다고 보기 어렵다.

 

참고로 ()무예24기보존회의 지도자격인 김영호와 최형국은 경당의 임동규 선생의 제자들이다. 임동규 선생은 과거 통혁당 재건 사건으로 무기수로서 10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감옥에서 무예도보통지를 보고 무예를 익혔다고 했다. 감옥에서 육법전서를 읽었다고 판사가 되겠다고 하는 것과 같이 가당찮은 일이지만, 그래도 우리 무예에 관심을 가진 몇 안 되는 인사로 그의 업적을 평가받고 있다. 임동규의 이러한 전력과 사상 때문에 경당에는 당시 좌파성향의 젊은 대학생들이 많이 모여들었었다. 그는 나중에 수원 화성에서 무예공연사업을 도모하던 중 당국의 허가없이 방북했다가 다시 형을 치러야 했으며, 그 틈에 수원화성의 무예공연사업이 제자 김영호와 최형국에게로 넘어가게 되었고, 그로 인한 내부 분란으로 서로 갈라서게 되자, 2005년 갑작스레 ()무예24기보존회가 만들어지고, 공연단원 모집에 들어갔다.

 

 

6. 신청인과 경쟁관계에 있는 유사단체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대변했다?

 

 

6-1 십팔기보존회는 이익단체가 아닌 임의의 연구 모임이다.

 

이번에 24기보존회에서 거론한 신성대, 박청정, 박금수는 과거 대한십팔기협회장인 김광석 선생에게서 기예를 배우고 협회 회원으로 활동한 적이 있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십팔기보존회는 20084월 대한십팔기협회에서 분리 독립하여 활동해 오고 있는 미등록 비영리문화연대일 뿐이다.

 

십팔기보존회의 목적과 취지는 십팔기가 비록 김광석 선생에 의해 전승 재현되었다고 하나, 이는 분명 조선의 국기로서 어느 특정단체만의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책을 펴내어 실기를 모두 공개하였으니, 이제는 시연을 통해 그 실기를 보여줘서 모든 타 종목 무예인들도 십팔기를 익힐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인데 비해, 오직 십팔기도장에서만 십팔기가 전해져야 한다는 협회원들의 주장과 상치하였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협회란 본래 그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이익을 대변할 목적으로 결성된다. 그렇지만 십팔기보존회는 순수하게 십팔기를 보전하고자 하는 취지로 모인 학술연구모임이며, 이를 위해 저술, 출판, 논문 발표를 주 업무로 하고 있으며, 각종 축제나 세미나, 대학 특강 등을 통해 십팔기의 기예를 선보이는 시연단을 운영하고 있다.

십팔기시연단 역시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오랫동안 십팔기를 익혀온, 각자 다른 직장을 가진 동호인들로 십팔기라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알려 보급코자 봉사하는 모임이다. 따라서 ()무예24기보존회를 비롯한 그 어느 단체와도 경쟁관계에 있지 않다. 또한 십팔기보존회의 활동을 모방한 후발의 단체가 선구적 개척자인 십팔기보존회를 유사단체로 지칭하는 것도 논리상 맞지 않는 표현이다.

십팔기보존회장이며 경기 데일리안 논설위원인 신성대는 우리나라 인문학 출판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도서출판 東文選 대표로서 대한십팔기협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나 2008년부터 독자적으로 십팔기보존회를 이끌고 있다. 십팔기보존회는 협회와는 달리 십팔기가 어느 특정단체의 전유물로서 그 단체의 이익을 위한 기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취지를 갖고 있다. 십팔기는 조선의 국기로서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익히고 아껴야 한다는 생각이다. 다만 그 실기와 명칭이 올바로 전해질 수 있도록 보전하자는 연구 모임이다.

<십팔기냐? 24기냐?>란 논문을 데일리안에 기재한 적이 있는 박청정 역시 과거에는 협회 소속으로 도장을 운영한 적이 있었으나, 2008년 대한십팔기협회를 탈퇴하였으며 지금은 도장을 운영하고 있지도 않다. 그는 2000년 최초로 무예도보통지주해를 펴낸 적이 있는 무예연구가로 수년째 무학사전저술에 몰두하고 있다. 이번에 신청인이 문제제기한 글은 논문 성격으로 학문적 토론 혹은 논쟁의 대상은 될지언정 제소 운운하는 것은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이다.(별첨책자)

십팔기보존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박금수는 서울대학교 공대 출신으로 서울대 체육교육과 석박사과정을 통해 십팔기의 역사와 실기를 전공한 전통무예연구가로서 대학강사로 활동 중이다.(별첨7)

따라서 십팔기보존회 및 위 세 사람의 활동 목적이 결코 자신들이 속한 단체나 과거 몸담았던 대한십팔기협회의 이익을 대변하는 데 있지 않다. 단지 학구적인 목적에서 십팔기와 무예도보통지를 연구하고 그와 관련된 오류를 바로 잡기 위한 글쓰기 및 보급 활동을 해오고 있다. 이번 사안은 신청인 측이 이러한 전후사정을 모르고 단지 십팔기보존회(협회)()무예24기보존회라는 단체 간의 이익다툼으로 여기고, 편향된 글쓰기를 하였다는 주장을 하는 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피신청인은 ()무예24기보존회의 활동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있음을 지적코자 했을 따름이다.

 

6-2 공공의 이익을 위한 비판을 손해배상을 유도하기 위한 경쟁단체간의 주도권다툼으로 몰아가는 것은 부적절하다.

 

십팔기보존회는 원칙적으로 수원 화성에서 행해지고 있는 ()무예24기보존회의 활동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왜냐하면 전통무예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관광산업활성화에 이바지한 공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십팔기를 널리 보급하고자 하는 십팔기보존회의 목적에도 부합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활동을 방해한 적도 없을뿐더러 방해할 이유도 없다. 다만, 그 과정에서 빚어진 역사적 사실의 왜곡과 편견을 바로잡고자 지적했을 뿐이다.

 

<데일리안>경기판 논설위원인 신성대가 설사 신청인의 주장처럼 이익이 서로 상반되는 단체에 소속되었었다는 이유로, 이 분야에 오래 종사한 무예전문가로서 잘못된 사안에 대해 알고서도 입을 다물고 넘어간다면 언론인으로서 자신의 의무를 소홀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이는 결코 유관단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글이 아니며, 선구적인 전통무예연구자로서 공공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한 비판이라 본다.

 

또한 현재 ()무예24기보존회는 연간 수억원을 지원받아 운영되고 있는 공연단체이다. 국민 혹은 도민의 세금으로 제대로 된 무예문화를 재현하고 있는지를 언제든 시민 또는 관련전문가들의 감시와 비판을 받아들여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한 나라의 전통무예를 무형문화재로 지정하는 문제는 관련단체들의 이익과 명분을 넘어 학계나 문화계, 그리고 역사에 걸쳐 국가적인 중차대한 일이다. 이처럼 중요한 사안에 대해 이런 저런 이유로 문제제기를 하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티끌만한 의문점이나 문제점이라도 소홀함이 없이 공개적으로 검토되어야 마땅한 일이다. 왜냐하면 십팔기는 어느 특정 문중이나 개인, 단체의 것이 아니라 국민의 것이고 국가의 소중한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비판과 의문점 제기에 대해 명예훼손, 손해배상 운운 하는 것은 마치 무예도보통지에 대한 기득권을 부여받은 양, 그리고 그로 인해 막대한 손해를 입은 양 주장하는 것은 상식에도 맞지 않다. ()무예24보존회가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이런 비판과 문제 제기를 받아 검증되어야 명실상부하게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로 지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국회에서 행해지는 청문회와 다를 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문제의 기사는 피신청인이 아니라도 누군가가 마땅히 제기했어야 한다고 본다.

 

 

7. 3억원을 피해보상하라?

 

 

무형문화재 종목 및 기능보유자 지정은 공공의 문화정책에 관한 일이다. 이는 결코 어느 특정한 집단이나 개인의 영리와 관련된 사안이 아니다. ()무예24기보존회가 이번 부결의 책임을 피신청인에게 돌리고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이번 일을 영리사업 쯤으로 여기는 듯하다.

 

무형문화재 지정은 그 분야 전문가의 고증작업을 거쳐 전승문화임을 확인하고,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할 가치가 있는가를 판단하고 결정하는 문화정책이지, 누가 방해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정부기관이나 지자체에서 발주하는 사업권을 두고 경쟁단체끼리 다투듯 비방, 제소, 손해배상하거나 할 사안이 아니다.

 

오르지 문화재 지정 신청인의 자격과 지정코자 하는 기예의 진위, 그리고 전승계보에 대한 철저한 검증을 거쳐야 할 뿐이다. 따라서 그 과정에서 제기되는 의문이나 문제점에 대해서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비판받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피신청인은 경기도 무형문화재 지정 심사를 방해할 목적으로 글을 올린 것이 아니라, 보다 정확한 판단을 위해 관련정보를 제공코자 했을 따름이다.

 

설사 피신청인의 문제제기 없이 최종심사에서 가결되었다 하더라도 공시절차를 거쳐야 할 것이고, 그땐 피선청인 뿐만 아니라 사방에서 이 같은 지적이 쏟아질 것은 예상하고도 남는 일이다. 그때 가서 뒷일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참고자료 :

 

 

1. ()무예24기보존회 관련자료

2. <조선 후기 공식무예 명칭 십팔기에 대한 고찰

3. 십팔기보존회원 명단 및 대한십팔기협회 임원명단

4. 십팔기보존회 활동내력

5. 십팔기보존회활동 신문기사

6. 십팔기보존회활동 뉴스 및 방송자료 CD

7. <십팔기냐? 24기냐?>

8. 수원 무예24기 무형문화재 신규지정 및 보유단체 지정 심사에 대한

의견서(이의제기)

9.무예도보통지 실기해제(1987, 심우성 해제/김광석 실연, 東文選)

10.본국검-조선검법교정(1995, 김광석, 東文選)

11.권법요결(1989, 김광석, 東文選)

12.무예도보통지(영인본, 1998, 정조, 東文選)

13.조선창봉교정(2002, 김광석, 東文選)

14.무덕(武德)(2006, 신성대, 東文選)

15.무예도보통지주해(2007, 박청정, 東文選)

16.한국의 전통무예 십팔기(2008, 최복규,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7. <조선의 국기 십팔기’-전승의 역사와 그 가치>

* 도서출판 東文選은 피신청인 신성대가 운영하는 출판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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