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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예청(武藝廳)이란?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07-07-25 15:01     조회 : 4957    

글쓴이 : 박금수(서울대 체육교육학과 박사과정)

무예청은 당시 최고의 기예를 가진 무사들로 구성되어 궁궐의 수비와 왕의 최근접 호위(護衛)를 맡은 기구였다. 이 무예청에 소속된 별감을 특별히 '무예별감(武藝別監)' 또는 줄여서 '무감(武監)'이라 칭하였다.

무예청의 창시과정은 순조(純祖)가 지은 『순제고(純齋稿)』에 자세히 나와 있는데, 무예별감이란 임진왜란 당시 피난길에 나선 선조(宣祖)를 호위했던 열명의 훈련도감 무사들에게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와 그 노고를 치하하여 하사한 명칭이라고한다. 또한 무예별감들은 십팔기를 익혔는데, 그 중 본국검(本國劒)과 월도(月刀)를 가장 중요한 기예[元技]로 익혔다고 한다. 이는 칼을 차고 왕을 호위하는 것이 이들의 주요임무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위의 그림은 정조대왕이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에 참배하기 위해 수원 화성으로 행차하는 과정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 실려 있는 반차도(班次圖) 중 일부로, 정조를 호위하고 있는 무예청의 모습을 잘 살펴볼 수 있다. 본래 의궤에는 색을 넣지 않았지만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의 한영우 교수가 철저한 고증에 의해 채색을 한 것이다.
무예별감은 훈련도감의 별기군(別技軍 : 마병(馬兵)과 보병(步兵) 및 그 족속 중에서 힘이 세고 신체가 좋으며 기술에 능한 자를 따로 선발하여 항상 기술을 학습하는 자를 ‘별기군’이라 하였다.) 중에서 추천하여 왕의 재가를 받아 임명하였다. 이들은 또한 훈련도감ㆍ금위영ㆍ어영청ㆍ총융청에 무예 교련관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무예청의 구성은 대령무예청(待令武藝廳)이 46명, 가대령무예청(假待令武藝廳) 40명으로, 위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모두 붉은 군복에 칼을 차고 시위(侍衛)하였다. 나머지 87명의 문무예청(門武藝廳武監)은 홍철릭(紅天翼)을 입고 황초립(黃草笠)을 썼으며 모자 위에 호수(虎鬚)를 달고 궁궐의 각 문에서 창과 칼을 차고 파수를 섰다.






위의 이미지는 『순제고(純齋稿)』중 「무예별감창설기(武藝別監創設記)」로 음영처리를 한 부분에서 무예별감을 십팔기로 훈련시켰음을 분명히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래에서 왼쪽 그림은 정조가 화성에 행차하여 군사훈련을 지휘한 모습을 담은「서장대야조도(西將臺夜操圖)」이며 오른쪽 그림은 지휘소인 서장대 부분을 확대한 것이다. 정조가 자리한 서장대 바로 앞에 홍령기(紅令旗)와 붉게 칠한 곤봉인 주장(朱杖)을 들고 도열한 무예청을 볼 수 있다. 홍령기는 왕명을 전달할 때 쓰이는 것이지만 이 또한 유사시에는 적을 찌르는 창으로 쓸 수 있는데 이를 기창(旗槍)이라 부른다. 기창은 십팔기의 정식 종목 중 하나이다.






창덕궁과 창경궁의 모습을 그린 동궐도(東闕圖)에는 무예청 청사(廳舍)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다. 다음의 그림을 보면 무예청의 위치를 알 수 있다. 그리고 무예청 옆에 통장청(統長廳)이 있는데 통장이란 무예청 중 최고 지위의 무사로 무예청에는 총 2명의 통장이 있었다. 무예청 바로 북쪽에는 낮은 단을 쌓은 공터와 군물고(軍物庫)가 보이는 데, 이곳에서 무예를 수련하고, 병장기를 보관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 지역은 현재 관광객의 자유로운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위쪽의 그림은 동궐도에서 무예청의 위치를 붉은 색으로 표시하였고, 아래의 그림은 『동궐도형(東闕圖形)』중 무예청 부근의 그림으로 무예청의 건물 구조가 상세히 나와 있다.
이상으로 조선후기 최고의 국왕 호위 기관이었던 무예청의 역사와 구성, 그리고 그림 자료에 나타난 이들의 구체적인 모습과 무예청 청사의 위치 등을 살펴보았다. 무예청은 국왕에 직속된 무사들로 임금과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였으며, 문(文)과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힘인 무(武)의 측면에서 정점에 서있었던 이들이었다.


참고자료

『萬機要覽』 中 「軍政編」
『統長窠設置節目』
『武藝歲首犒饋儀式』
『純齋稿』
『東闕圖』
『東闕圖形』
『園幸乙卯整理儀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