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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법(拳法)이란 무엇인가?
  글쓴이 : 신성대     날짜 : 08-01-17 20:21     조회 : 8194    

◇ 십팔기의 하나인 <권법>

전투 중에 무기를 잃거나 탄환이 떨어졌을 때, 혹은 근접전에서는 맨손으로 싸워야 한다. 따라서 맨주먹으로 싸우는 것도 무예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이는 무예 상식에서 한참 벗어난 생각이다. 무기나 탄약이 떨어졌으면 항복하거나 도망칠 일이지 어찌 맨주먹으로 싸운단 말인가? 상대도 맨주먹이라고? 어쩌면 그렇게 동시에 서로 총알이 떨어진다?

물론 어찌하다보면 맨손으로라도 싸워야 하는 돌발적인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렇지만 현실에선 그런 영화 같은 공교로운 상황은 여간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별난 상황을 가상해서 평소에 권법 훈련을 시키는 것이 아니다.

권법이 때로는 개인의 호신술로 사용되기도 한다고 해서 주먹다짐을 무조건 무예라고 주장하는 것은 성급한 결론이라 할 수밖에 없다. 동네 골목에서 노는 아이들의 전쟁놀이가 아닌 다음에야 맨손으로 적과 싸우러 나가는 법은 없다. 산에 토끼를 잡으러 가도 작대기나 돌멩이를 들고 올라가고, 남의 집에 강도짓을 하러 들어가도 작은 칼 한 자루는 들고 들어가는 법이다. 무예란 개인 간의 골목싸움(다툼)이나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완력기르기가 아니라, 적과의 싸움(살상)을 대비한 기예이다.

무예의 기술 내용은 크게 도수기술(徒手技術)과 병기기술(兵器技術)로 나눌 수 있다. 흔히 이 도수기술을 권법 또는 권술이라 부르는데, 이는 병기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기초가 되므로 모든 무예수련의 기본으로 잡는다. 따라서 무예인들은 반드시 평소에 도수기술을 익혀두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맨손기술은 평소에는 운동과 오락의 기능을 겸하였다. 중국의 한(漢)대에는 각지에 도시가 형성되면서 궁중은 말할 것도 없고 민간에까지도 각저(角抵), 수박(手搏) 등 맨손 기술이 매우 성행하였으며, 이를 많은 고분 벽화에 남겼는데, 한(漢)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고려 후기에는 각저희(角抵戱), 수박희(手搏戱)라 하여 공연적인 대련의 내용이 가미되면서 각종 궁중 연회의 단골 오락 종목으로 성행하기도 했다. 당연히 민간에서도 인기가 있는 볼거리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각저(角抵)는 글자 그대로 뿔(머리)을 맞대고 힘과 기술을 겨루는 운동으로 각력(角力), 상박(相撲) 등으로 불렸으며, 오늘날의 레슬링이나 씨름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수박(手搏)은 도수박타(徒手搏打)의 줄임말로서, 손이나 발로 치고 때리는 기술을 말한다. 상박(相搏), 백타(白打), 권박(拳搏), 권술(拳術) 등으로 불렸으며, 오늘날의 택견, 태권도, 가라테 등과 유사한 것들을 말한다. 각저와 수박은 때로는 명확한 구분 없이 혼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탁견희(택견)와 함께 《해동죽지(海東竹枝)》 <속악유희(俗樂遊戱)>편에 나오는 수벽타(手癖打)는, 서로 마주 보고 손뼉을 치고(때리고) 노는 것으로 권법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동네 아이들의 놀이일 뿐이다(정확히 어떻게 치고 놀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의 아이들이 하는 장난 놀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 손뼉치기(손때리기) 놀이를 수박(手搏)과 호칭이 비슷하다 하여 대단히 신비한 우리 민족만의(세상에 그런 정신 나간 민족은 또 없을 테니까) 비전 무예라고 팔고 다니는 것은 지극히 무지하거나 간특한 소치라 할 수밖에 없다.

엄밀한 의미에서 수박이나 각저류는 무예라 하지 않을뿐더러 ‘권법’이라 부르기에도 충분치 않다. 고대체육(대개 과격한 몸싸움)을 칭하는 일반명사로서 글자 그대로 수박 또는 각저일 뿐이다. 후대에 와서 무예의 발전과 더불어 ‘법식을 갖춘 무예의 기본’으로서 체계를 갖추어서야 비로소 ‘권법’이라는 무예의 필요조건을 갖추게 되었다고 봐야 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선 먼저 ‘예(藝)’라는 글자를 살펴봐야 한다. 고대는 물론 불과 한 세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 조상들은 이 ‘예’자를 함부로 아무데나 붙이지 않았다. 서예와 무예 이외에는 없다. 조선 후기에 와서 활쏘기를 ‘사예(射藝)’라 부른 적은 있지만, 이 역시 무예에 속한 것이다. ‘십팔기’를 ‘십팔기예(十八技藝)’라 부르기도 하여 민간에서는 ‘십팔계’로 통하기도 했었다.

즉, 아무렇게나 붓으로 글씨를 쓴다고 서예가 될 수 없으며, 아무나 무기를 휘두른다 해서 무예라 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 엄격하게 정형화 된 법식을 갖춘 기예여야만 비로소 이 ‘藝’를 붙여주었던 것이다. 실록에서도 고려 중기를 지나서야 ‘무예’란 말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 전에는 대체로 그냥 ‘武’라고만 하였었다.

수박이나 각저는 고대의 병사들이 즐기던 체육이자 오락이었다. 북한식 표현으로 ´무술단련놀이´였던 것이다.(오늘날에도 군부대에서 이와 유사한 군사체육이 많이 행해지고 있다) 또한 궁중 연회에서 행해질 때에는 거의 잡기(雜技) 수준의 놀이였다. 굳이 고구려의 고분 벽화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고려나 조선의 왕조실록에는 왕들이 수박과 각저를 즐겼다는 기록이 많이 실려 있다. 거의 대부분이 궁중 연회 중 오락으로 즐겼었다.

한결같이 그저 볼거리 행사였지 결코 무예로서 행해진 것이 아니다. 물론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왕들은 군사나 장수들의 무예를 시험하는 행사를 자주 열었다. 그때는 수박이나 각저, 그리고 격구 등도 함께 행했지만 대개는 활쏘기나 창검술 등의 정식 무예였다. 그러면 궁중 연회에서는 왜 이런 무예 시연을 하지 않고 수박희나 각저희처럼 잡기들만 구경하였단 말인가? 하지만 그건 당연한 일이다. 왕이나 외국 사신들의 면전에서 무기를 휘두르다니! 연회장은 고사하고 궁중 안으로 어느 누가 칼 한 자루 들고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조선의 국기 십팔기에는 ‘권법(拳法)’이 정식 무예 종목으로 올라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결코 수박이나 각저가 아니다. 놀이나 호신용이 아닌 무예로서의 권법이다. 왜냐하면 나중에 병장 무예를 익히기 위한 법(法)과 식(式)을 갖추어 기예로서 정식 이름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천 년 전부터 해오던 수박이나 각저는 구체적인 동작의 기록이나 정형화된 법식이 전혀 남아 있지를 않다.

때문에 각 시대마다 나라마다 그 내용이 똑같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였던 셈이다. 무예로서의 법식을 지닌 것이 아니라, 그저 보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어야 했기 때문에 상당히 과장되고 곡예화된 기술을 구사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권법을 응용한 유희로서 일종의 고대 스포츠였다고 보면 된다.

《무예도보통지》를 만들면서 그 부록으로 군사 오락인 마상재(馬上才)와 격구(擊毬)를 실어 놓았다. 그렇지만 수박이나 각저는 실려 있지 않다. 만약 당시에 그것들을 무예로 취급하였거나, 아니면 최소한 군사 체육으로라도 인정하였거나 무슨 정형화된 법식이 남아 있었더라면, 2백 여 년 동안 그토록 우리 무예를 찾고 또 체계화하려고 애썼던 조정에서 그냥 두었을 리 없지 않은가. 그러나 《무예도보통지》에는 이에 대한 별도의 언급조차 없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수박희나 각저희를 행하였다는 기록은 수없이 많이 나오지만, 역대 무예 행사나 군사(軍事)에 관한 기록을 정리해 놓은 〈병기총서(兵技總廻)〉편에서는 무예청 군사들이 각저 시합을 하였다는 단 한 번의 언급만이 있을 뿐이며, 또 〈권법(拳法)〉편의 ‘案’(지금의 참고 자료 또는 주석에 해당)에서 《한서(漢書)》에 나오는 “수박(手搏)은 손바닥으로 힘을 겨루는 것(팔씨름)으로 무희(武戱)가 된다”고 한 예를 실었을 뿐이다. 매우 정확한 언급이다.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무예와 놀이를 구분하지 못했을 만큼 무지했다고 생각할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결국 권법의 최종적인 목적은 건신과 호신에만 있지 않고 무예, 즉 병장기를 다루기 위한 기초적인 신체 단련에 있다고 정의할 수 있다.

최근 본인이 태권도나 택견 등 호신용 맨손 기술들을 분류상 무예에 속할 수 없다는 주장을 제기하자, 그 운동을 하는 많은 분들이 자신들이 하고 있는 것은 분명 무예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 근거로 고구려 무용총 벽화나 고대 문헌에 나오는 수박이나 각저라는 용어(법식을 갖춘 실제 기예가 아닌)를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고려 말기, 조선 초기 실록에 등장해오던 수박이나 각저가 지금의 태권도나 택견의 모태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이 용어는 동양3국 모두가 사용했던 일반 명사이다.

특히 임란 이후 정식 <권법>이 군사훈련에 도입됨에 따라 더 이상 수박이나 각저가 필요 없어진 것이다. 궁중연회나 군사들이 익혔다고는 하나, 이미 조선 세종 이후에는 역사서에서 자취를 감춘다. 이로 미루어 이후 민간으로 흘러들어 민속놀이로 전해졌을 수도 있음은 유추할 수도 있겠으나, 그러기 전에 절로 완전히 멸실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굳이 군사체육용 수박이나 각저가 아니더라도 민간에서는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나고 없어지고 했을 터이기 때문이다.

고려실록에 나온 수박이나 각저가 조선실록에 나온 것과 반드시 동일한 것일 수도 없고, 군영마다 다르고, 지방마다 다른 형태로 행해졌다고 볼 수 있다. 정조 시대《재물보(財物譜》(무예서가 아니다) 기희(技戱)편에 언급 된 택견에 대한 기록이 《해동죽지》유희(遊戱)편에 기록된 것과 똑같은 형태의 놀이였는지도 알 수 없다. 동시대라 해도 동네마다 조금씩 다른 것이 민속놀이이다. 그래서 태권도와 택견은 지금도 끊임없이 변질되고 있다. 민간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 흘러왔다는 뜻이다. 《무예제보》《무예신보》《무예도보통지》처럼 십팔기의 모든 기격 동작을 세명과 그림으로 설명한 교본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택견이 궁중의 연희나 고대 군사체육인 수박이나 각저에서 나와 민간으로 흘러왔던, 아니면 민간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나 흘러왔던, 분명한 사실은 놀이이지 결코 무예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이름이 등장할 때부터 이미 민속놀이의 하나였고, 또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택견은 항상 각법 혹은 각술의 놀이로 표현되어 왔다. 발기술과 병장무기와는 애초부터 실오라기 한 올만큼의 연관도 있을 수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무예로서의 권법과 호신술로서의 권법은 확실하게 구분된다. 예를 들면, 십팔기의 <본국검>을 칼을 놓고 맨손으로 운용해도 훌륭한 권법이 나온다. 반대로 십팔기 <권법>을 칼을 잡고 조금만 변화를 주면 훌륭한 검보 하나 만들어진다. 비록 글로서는 설명하기가 복잡하여 제대로 무예를 익히지 않은 사람들은 이해가 힘들겠지만, 동작을 보여주면서 설명하면 초보자라도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역시 다른 병장기를 들어도 마찬가지이다. 무기에 따라 그만큼 자신의 팔이 길어졌다고 이해하면 된다. 그렇지만 주먹다짐용 호신 권법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바로 이런 점도 무예와 무예 아닌 것의 차이 중의 하나이다. 놀이나 호신용 권법처럼 상대의 맨주먹만을 상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병장기를 다루기 위한 몸 만들기이다. 그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고대의 병사들이 익히던 수박과 각저는 차츰 발전되어 무예로서의 권법으로 정형화되어 왔지만, 민간에서 전해져 오던 수박과 각저는 점점 놀이(戱)화 되어 갔다. 택견을 무예로 인정할만한 근거를 도무지 찾을 수 없다. 단지 택견이 고대 군사들이 익히던 원시적 권법인 수박에서 비롯된 놀이의 하나로 유추해볼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당시의 군사들이 익히던 것이니 당연히 택견은 무예다라고 하는 주장은 수 백만년 전, 인간과 원숭이의 조상이 같았다 하여 원숭이도 곧 인간이다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억지에 지나지 않는다. 씨름(각저)을 두고는 누구도 무예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현재까지 발굴된 택견에 관한 문헌적 자료로는 《재물보》《해동죽지》《조선해어화사》의 기록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 기록들은 택견을 한결같이 놀이(戱)로 분류하고 있다는 점이다. 택견이 놀이냐 무예냐 하는 문제는 기실 조상님들이 해놓은 그대로 따르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혼란의 불씨가 된 택견의 무예종목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지정은 이처럼 무예에 대한 상식조차 없는 상태에서 문헌에 대한 고증마저 소홀히 한 결과 저질러진 실수라고 볼 수 있다.

세계화의 시대를 맞아 흔히들 가장 우리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비록 일제 식민지배가 36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한번 끊어진 문화의 맥을 다시 잇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다. 특히 식민무예문화는 그 뿌리가 너무 깊이 박혀 해방된 지 반 세기가 훌쩍 넘었어도 도무지 자각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바야흐로 세계는 문화의 시대, 아니 문화전쟁의 시대를 맞고 있다. 우리 무예의 주체를 바로 세우는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