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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중국의 힘, 무협(武俠)
  글쓴이 : 신성대     날짜 : 07-10-02 16:17     조회 : 6056    

신성대
전통무예연구가
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전통무예십팔기 보존회 회장
국군전통의장대 십팔기 사범
인터넷 신문 [데일리안 경기] 논설위원 

중국의 무협(武俠)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문학이나 영화를 통해 세계인에게 잘 알려져 있다. 유구한 역사와 드넓은 영토, 끊임없는 황하의 몸부림, 풍족한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피어난 화려한 문화, 이를 탐내고 끊임없이 쳐들어오는 북방의 오랑캐. 대개 나라가 크면 자연히 무(武)를 숭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영국의 웰스는 《인류의 운명》에서 “대부분 중국 사람들의 영혼 속에는 한 명의 유가(儒家), 한 명의 도가(道家), 그리고 한 명의 도적이 싸우고 있다”는 관점을 인용하였다. 문일다(聞一多)는 웰스가 말한 ‘도적’은 중국 무협을 포함하고 있고, 도가는 다만 유가에 대한 보완일 뿐이라고 했다. 근래 어떤 학자는 “묵협정신(墨俠精神)이 민간 문화를 이루어 상층 문화 정신과 대립하고 있다”는 관점을 제시한 바 있다. 중국 현대 작가 심종문(沈從文)은 “민간 사회 중에서 유협 정신(遊俠精神)이 침윤(浸潤)되어 과거를 만들었고 미래도 형성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상 · 하층 문화 중에서 유(儒)와 협(俠)은 중국 전통 문화 정신의 중요한 두 체제인 것이다.

진산(陳山)은《중국무협사(中國武俠史)》에서 말하기를, “중국에 있어 협(俠)은 유(儒)와 마찬가지로 선진(先秦)시대에 나타나 지금까지 계속 존재해 오고 있는 오랜 역사를 지닌 사회 계층이다. 협(俠)과 유(儒)의 문화 정신은 일종의 초월 의미(超越意味)를 내포하고 있어 심리적으로 광범위하고도 지속적인 영향을 주며, 중국 문화의 심층 구조에 침투해 있다. 중국 지식인의 영혼 속에 부지불식중에 유(儒)의 그림자가 숨겨져 있다면, 중국 평민의 마음 깊은 곳에는 협(俠)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다. 그러므로 중국 역사상의 무협 현상을 연구하는 것은 중국 문화 기초인 민간 문화의 뿌리를 깊게 연구하고, 이를 전면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중국의 선진(先秦)시대에는 온 백성이 검(劍)을 숭상하고 무예를 익히는 사회적 기풍이 농후하였다. 그리고 춘추 시기에 이르러서는 그동안 무사 계층을 의미했던 ‘사(士)’가 분화되어 문사(文士)와 무사(武士)로 나누어지게 된다. 춘추 말기에는 전문 자객의 출현을 보게 되고, 전국시대에는 군웅(群雄)들의 할거 속에 유협(遊俠)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양한(兩漢)시대에는 드디어 본격적인 무협(武俠)의 형태가 갖추어지며, 수많은 협객(俠客)과 호협(豪俠)이 생겨난다. 송대(宋代)에는 도시 사회의 발달과 더불어 근대 협(俠)의 형태인 무림(武林)이 형성되고, 그들의 무덕인 ‘협절(俠節)’이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비로소 협의(俠義) 소설이 등장하며 무협 문화가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명청(明淸) 양대에 이르러 중국 무술은 최고조에 달해 소림(少林) · 무당(巫堂) · 아미(蛾眉) 등 많은 유파들이 등장하여 본격적인 무림시대를 열었다.

흔히 중국의 무예인들은 ‘무협(武俠)’ 혹은 ‘협객(俠客)’으로 불리길 좋아한다. 그렇다고 무림의 사람들 모두가 무협이 될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무덕(武德)으로써 평가한 연후에야 몇몇 이들을 무협으로 인정하였다. 무덕의 품위면에서 고상한 품격과 절개를 지니고, 행동 방식에서 두드러진 사람들만을 무협이라 하였다.

그들은 의(義) · 절(節) · 명(名)을 최고의 도덕규범으로 삼아 평생 동안 추구하였다. 또한 무림의 협사들은 의협(義俠)한 사람의 개인 존엄을 생명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으며, 간악함을 혐오하여 용서치 않았다. 또한 그들은 사제(師弟) 관계를 무엇보다도 중시하였으며, 정파는 물론 비록 녹림(綠林)의 무리일지라도 신의(信義)를 목숨처럼 아꼈다.

중국의 무협은 서양의 기사(騎士)나 일본의 무사(武士)와는 달리 하층 사회 대중문화의 산물이다. 따라서 그들의 가치 관념은 순박성을 띠고 있다. 서구의 기사처럼 사회의 어떤 추상적인 종교 정신이나 행위 규범에 대한 의무감이나 사명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또한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주군에 대해 어떤 책임도 없었다. 그들은 우의(友誼)를 매우 중시하여 동지와 의기 투합하고, 친구의 어려움을 보면 죽음을 불사하고 뛰어들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해 깊은 동정심을 가지고 있어, 가족 관계나 이해관계에 상관없이 불의(不義)나 불공평을 보면 의기(義氣)를 발휘하여 칼을 뽑기를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협(俠)이 다분히 인정(人情)에 기인하였으며, 이성과 실리가 기준이 되는 가치관이 아니었음을 말해 준다.

현대 중국인의 마음속에 자리한 협(俠)은, 실상 송대(宋代) 이후 세속화된 근대 협(俠)이다. 청대(淸代) 중기를 지나면서 실제 무림(武林)이 사라지고 무협 소설 등 대중문화 상품이 점차 발달하여 확산되자, 협(俠)은 이제 중국인의 순수 정신현상으로 자리하게 된다. 그리하여 현대 민간사회 속에서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며 중국 현대화의 거대한 동력이 되고 있다.

중국 역시 지난 한 세기 동안 어느 나라 못지않은 격렬한 역사적 진통과 굴욕을 겪었다. 그 가운데 가장 특이한 일은, 어쩌면 당연했을, 신해혁명이 일어나면서 수천 년 중화사상의 대들보인 유학을 담장 밖으로 내던져 버린 것이다. 공귀(孔鬼)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사회주의의 등장은 문(文)에 대한 무(武)의 전복이라고 볼 수 있다. 문약(文弱)해 빠진 늙은 왕조에 대한 염증에서 절대 권력에 의한 무치(武治)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장제스(蔣介石)와 마오쩌둥(毛澤東)은 둘 다 무장임에도 불구하고 성격면에서는 문무(文武)의 대별이었던 것이다. 덕분에 제국주의로부터 온전히 나라를 지켜낼 수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무(武)로써 무(武)를 막아낸 것이다.

그렇지만 무치(武治)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는 법. 죽(竹)의 장막으로 간신히 13억 인구 굶기지 않았다는 것 이외엔 그다지 한 일이 없어, 또다시 세계사의 뒤안길로 밀려날 처지에 직면하게 된다. 다행히 덩샤오핑(鄧小平)의 시대를 맞아 서서히(사실은 급격히) 개방의 문을 열기 시작하였다. 총칼로 짓는 농사로는 더 이상 늘어나는 인민을 먹여 살릴 수 없음을 뒤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결국 무치(武治)에서 문치(文治)로의 전환은 수많은 문사(文士)를 필요로 하였으니, 공자(孔子)의 부활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바야흐로 현재의 중국은 역사상 그 어떤 시대와도 비할 바 없는 비약적인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중이다. 옛 수당(隋唐)의 영화도 아마 이보다는 못하였을 것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문무(文武)가 극적으로 균형을 이루는 시기를 맞은 것이다. 오늘의 중국이 지향하는 모델은 더 이상 한국도, 일본도 아니다. 바로 미국이다. 이제 모든 길은 중국으로 통한다. 이제 다시는 무(武)를 소홀히 하지 않을 것이다. 두 번 다시 역사의 조롱거리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을 한쪽 발 끝으로 가볍게 찍고 일본으로 풀쩍 건너간 원바자오의 능수능란한 외교술이 우리를 한없이 부럽게 한다. 자신감에 여유까지 넘친다. 힘 있는 자만이 구사할 수 있는 전략이다. 분명한 사실은 세계로 뻗어가는 중국문화의 최전선에는 언제나 무협이 있다는 것이다. 일본문화의 최전선엔 사무라이(武士道)가, 미국엔 람보(총)가 있듯이. 기왓장 깨는 맨주먹으로 정글과 사막을 누비던 시절도 이제는 한참 지났다.

승부는 입(口)이 아니라 힘(武)으로 가리는 것이다. 힘이 있어야 자신을 드러낼 수가 있다. 진정한 무(武)의 정신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역사는 또다시 우리를 내동댕이칠 것이다. 국기(國技) 십팔기(十八技)를 되살려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글은 인터넷 신문 데일리안에 연재중인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