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십팔기협회 :::


   
  한국현대무예사
  글쓴이 : 신성대     날짜 : 07-08-23 19:39     조회 : 6577    

◇ 87년 12월2 2일, 한국민속극연구소 주최로 열린 <해범 김광석 한국무예발표회>. 우리나라 현대무예사의 큰 이정표가 되었다.


신성대
전통무예연구가
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전통무예십팔기 보존회 회장
국군전통의장대 십팔기 사범
인터넷 신문 [데일리안 경기] 논설위원

조선 말기, 화포무기의 발달과 함께 고대병장무예인 십팔기의 효용성이 차츰 떨어지다가, 신식군대의 신설로 인한 구식군대의 차별, 그로 인한 임오군란, 외세의 개입, 결국 나라가 망하면서 무예 십팔기도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게 되는 운명을 맞고 만다. 대신 그 자리에 검도, 유도로 대표되는 일본 무도가 강제로 이식되었다.

일본의 이러한 무도교육은 식민 지배를 위한 정책적 차원에서 강압적으로 자행되었는데, 군(軍)은 말할 것도 없고, 경찰, 심지어 모든 학교에까지 무도교육을 의무적으로 가르치게 하였다. 그리하여 해방이 된지 6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이 식민무도교육은 고스란히 그대로 답습되고 있다. 지금도 군, 경찰, 사관학교는 말할 것도 없고 일부 사립학교에서는 변함없이 검도, 유도를 체육교육의 일환으로 가르치고 있다. 특히 ´민족´ 운운하며 민족정신을 강조하는 학교일수록 이 일본무도교육에 더욱 열을 올리는 쑥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식민 치하에서 벗어난 지 60년이 지났건만, 다른 문화계와는 달리 유독 무예계에서만은 이 식민문화에 대한 반성은 고사하고 아직 자각조차 못하고 있다. 오히려 그 연원을 감추고 전통적인 것으로 미화해서 더욱 번성하고 있다. 언제든 고치거나 버릴 수 있는 다른 유형의 문화와는 달리 몸과 마음으로 익힌 것은 이처럼 여간해서 버려지지 않는 속성이 있다. 심지어 그런 사실을 인정하기조차 싫어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이에 대한 반성과 편견 없는 성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식민시대의 일본무도 및 해방 후 중국무술의 유입과정과 그로 인해 생겨난 우리 전통무예의 왜곡, 우리 문화전반에 끼친 영향과 공과, 무엇보다 그로 인한 우리 민족정신과 정체성의 혼동에 대한 학계의 연구가 시급하게 시도되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십팔기로 대변되는 전통무예에 대한 새로운 자각도 병행되어야 한다.

어쨌든 일제 시절에는 조선의 국기였던 ´십팔기´의 실체는 단 한 번도 역사에 등장하지 못하고, 단지 그 이름만 전설처럼 전해져 왔었다. 지금의 8,90대 어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 이름만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고, 또 그동안 저자거리에서 싸움을 유달리 잘하는 사람을 두고 ´십팔기´를 한 사람이라는 둥, 소문만 전해져 내려왔을 뿐이다.

해방이 되었지만 제도권에서의 검도와 유도가 그대로 그 위치를 지키고 있고, 해방 전후를 즈음하여 일본 유학생들에 의해 시중에는 카라데(空手道, 唐手道)와 일본호신술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일본에는 이전부터 왕족과 귀족들만을 위한 호신술, 즉 체술(體術)을 가르치는 곳이 있었는데, 이를 체술원이라 하였다. 여기서는 도합 16가지의 체술을 가르쳤는데, 모두 자기 몸을 보호하기 위한 맨손 기예들로서 잡아채고, 꺽고, 넘어뜨리고, 젖히는 금나술(擒拿術)이다. 이와 유사한 기예들이 40년대 전후에 일본 시중에서 호신술로 보급되다가 합기도(合氣道)란 이름으로 얻은 것이다.

한국인으로서 유일하게 정식 체술원 출신이 한 사람 있었다. 우리나라 합기도계에 전설처럼 그 이름만 전해져 오는 반 선생이다. 그분은 체술을 비롯해 여러 무예를 습렵하고, 또 나름대로 크게 성취를 이루었으나, 저자거리 무예계에는 관심이 없어 눈길 한번 준 적이 없었다. 과거 합기도계의 많은 원로들이 그분을 한번이라도 만나 뵙기를 소원하였지만 한 번도 허락한 적이 없었고, 또한 단 한명의 제자도 두지 않고 80년 무렵 타계하셨다. 생전에 무예계 사람으로는 오직 한사람과만 교유를 하셨는데, 바로 십팔기의 해범 김광석 선생이다. 필자가 처음 십팔기에 입문한 69,70년 무렵, 서울역 도장으로 해범 선생을 자주 찾으셔서 몇 번 뵌 적이 있다.

그리고 지금의 태권도는 원래 카라데, 즉 공수도(空手道)로서 그 뿌리는 오키나와에서 온 호신용 권법이었다. 해방 전후 일본에서 귀국한 유학생들에 의해 우리나라 시중에 퍼지기 시작했는데, 해방 후 태수도(跆手道)란 이름을 거쳐 65년 정식으로 태권도로 개명하여 한국 것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그것이 월남 파병을 계기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지면서 한국의 대표적인 호신용 경기체육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무예란 무기를 다루는 기예를 말하는데, 십팔기가 사라진 후에 전통적인 고전 병장무예가 이 땅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50년대 후반부터 서울과 인천에 있던 화교학교에서 국술을 가르치던 이지랑 선생과 임품장 선생, 그리고 노수전 선생이 60년 무렵, 시중에 중국무술도장을 열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뒤를 이어 이덕강 선생이 지금까지 도장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때 여러 명의 한국인들이 여기서 중국무술을 배워 나갔다. 물론 그분들이 한국에 소개한 무예도 중국의 정통 명가의 무예라기보다는 대개 대만이나 홍콩의 시중에 퍼져있던 호신용 권법들이었다.

6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일간지에 무협소설이 연재되고, 뒤이어 중국무협영화가 수입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그동안 중국인 도장에서 배우던 한국인들이 시중에다 너도 나도 도장을 열기 시작했는데, 70년에는 서울 시내에 5,6개의 도장들이 새로 생겨났다. 마침 전 세계적으로 ‘쿵후’ 열풍이 몰아치던 시기여서 장안의 중국무술도장들은 전성기를 맞았다. 그렇다 해도 전국적으로 10여개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원래 ´쿵후(工夫)´란 말은 글자그대로 ´공부하다´ ´연마하다´ ´닦다´는 뜻이었다. 이것이 서양으로 건너가 중국무술을 표현하는 말이 되어버렸다. ´마샬아트´니 하는 용어에 익숙치 않았던 중국인들이 그냥 수련한다고 말해준 것이 중국무술을 뜻하는 용어로 굳어버린 것이다. 물론 서양인에게 설명하는 중국무술, 동양무술, 고전무술을 통칭하는 일반 용어이지 구체적으로 어떤 특정 무예 종목을 가리키는 뜻은 아니다.

해방 후 ´십팔기´가 세상에 드러난 것은 69년 10월 3일, 해범 김광석 선생이 서울역 근처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십팔기도장을 개원하면서이다. 집안의 내력 때문에 어렸을 적부터 무예 십팔기와 심신수양법을 익혀온 해범 선생은 전쟁이 끝난 후 서울에 정착하면서 많은 무예인들과 교유했었는데, 당시 개인적으로 마땅히 운동할 곳이 없어 지인들의 태권도장(황기 선생의 무덕관)이나 중국무술도장을 오가며 혼자 수련을 하던 차에 아예 도장을 연 것이다. 그러자 중국무술계의 원로들은 물론 서울의 모든 무술도장 관장들이 이곳을 사랑방처럼 드나들게 되면서 십팔기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즈음 한국인이 운영하는 중국무술 도장들도 십팔기의 정확한 뜻도 모른 체 ´십팔계´라는 글자를 ´쿵후´라는 글자와 함께 간판에 써 붙이기도 하였다. 당시에는 한국인이나 중국인 할 것 없이 모두가 십팔기를 중국무술로 여기던 시절이었다. 십팔기란 이름이 미처 제 자리를 잡기도 전에 세계적인 쿵후 바람이 불어 닥친 때문이었다. 해범 선생이 십팔기 도장을 연 것도 바로 이 시기였고, 역사적 사실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때여서 중국무술, 쿵후, 십팔기가 서로 뒤섞여버린 것이다.

두 손으로 칼을 엄숙하게 잡으면 일본 검도, 창이나 봉 등 여타 병장기를 을 다루면 중국무술, 권법을 하면 쿵후, 그저 맨주먹으로 벽돌이나 기왓장을 깨야 한국무술로 단정 짓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권법 및 창봉 등 온갖 무기를 다루는 십팔기는 당연히 중국무술로 인식되었다. 무예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일반인들은 물론 무예인들조차도 중국무협영화, 무협소설, 일본무협만화를 통해서 얻은 꽤 허황된 상식이 고작이었다. 물론 병장기를 다루는데 있어 중국무술, 일본무술, 한국무술이 그 기법에 있어 서로 크게 다를 수가 없고, 거의 유사할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런 혼란스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해범 선생만이 계속해서 십팔기가 우리 것이라고 고집하며, 그 이름 석 자 지키기에 혼신을 다하였다. 다만 도장 운영상 한 개 뿐인 십팔기의 권법 이외에 다른 호신용 권법이 더 필요하였기 때문에, 당시 유행하던 중국 권법도 함께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시의 분위기는 쿵후가 아니면 배우려들지 않았기 때문에 쿵후도 함께 써 붙여야 했다.

그러면서 이 무렵 한국무예계의 한편에서는 새로운 양상이 전개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이름의 무예 종목이 하나씩 둘씩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안일력의 ´정도술´, 조자룡의 ´불무도´, 해동검도의 전신인 ´심검도´, 범어사의 ´선무도´, 무예는 아니지만 국선도의 전신인 ´정신도법수련회´ 등등이 생겨나고, 또 생겨났다가 금방 사라진 것들도 많았다. 물론 어떤 역사적인 근거를 가지고 만든 것이 아니고, 대개 검도, 합기도, 중국무술을 조금씩 익혔던 사람들이 나름대로 창안한 것들이다.

하나같이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신비한 우리 무예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모두가 시중의 영화나 만화, 혹은 무예서나 무협소설을 모방하여 꾸며낸 이야기들이다. 이들에 얽힌 우스꽝스럽고 낯부끄러운 뒷이야기들이 많지만 차마 입에 담기가 민망해서 덮어 둔다.역사적 단절이 불러온 혼란 속에 생겨난 이런 황당하고 거창한 생계용 신(新)전통무예의 일부 종목이 성공을 거두자, 이후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전통무예가 신상품처럼 생겨나는 기현상을 보이게 된다.

70년대 중반, 일부 중국무술도장을 주도로 사단법인 <대한쿵후협회>가 결성되었다. 그러자 비록 그동안 중국무술인들과도 경계 없이 교류를 해왔던 해범 선생은 ´십팔기´의 보전을 염려하여 <대한십팔기협회>(76년 결성, 81년 문교부 사회단체 등록)를 만들었다. 이때 해범 선생을 따르던 약 절반 정도의 중국무술도장들도 대한십팔기협회에 가입했었다. 당시에는 도장을 개설하려면 협회의 인증서가 필요했었고, 협회의 단증도 발급받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십팔기를 가르치지 않은 중국무술도장에서도 십팔기단증이 발급되었다. 당시에는 모두들 십팔기를 중국무술로 알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 나라가 있으면 당연히 군대가 있었을 것이고, 군인들은 각종 무기들로 훈련을 했을 터인데, 그런 기본적인 상식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그다지 변하지 않았지만, 당시에는 오직 맨손과 낫, 곡괭이로 나라를 지켜온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병장기를 다루면 무조건 중국무술로 치부하던 때였다.

이렇게 해서 크게 양분되었던 무예계는 이후 몇 개의 중국무술협회가 생겨나 이합집산을 거듭하게 된다. 그러다가 얼마 후 해범 선생이 도장을 접고 무예계를 떠나고, 십팔기는 그의 몇몇 제자들에 의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해 나가게 된다. 여러 개로 쪼개져 있던 중국무술계는 90년 아시안 게임을 계기로 중국과 국교가 열리면서 ‘우슈’가 제도권에서 새로운 유망 스포츠로 떠오르자 모두 <대한우슈협회>로 통합하게 된다. 동시에 대한체육회 산하의 경기단체로 가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통무예´라는 용어가 무예계에 등장하고 이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기 시작한 계기는 85년 당시 민속학자이자 문화재전문위원이었던 심우성 선생과 해범 선생의 만남이었다. 평소 우리 무예와 전통 춤의 상관관계에 관심이 많았던 심우성 선생은 필자와의 인연으로 해범 선생과 조우하게 된다. 이 두 분의 만남은 그때까지 저자거리 왈패들의 주먹다짐 정도로만 인식되던 십팔기가 더없이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임을 깨우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전통무예로서의 십팔기의 전개양상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해범 선생의 십팔기와 그 전승을 확인한 심 선생은 더 이상 세상사에 관여하지 않으려는 해범 선생을 끈질기게 설득하여 그 실기를 세상에 공개토록 하였는데, 그로 인해 우리나라 최초로 십팔기 교본인《무예도보통지 실기해제》(심우성 해제, 김광석 실연, 1987, 동문선)가 출판되었다. 그리고 그해 12월 22, 23일 서울 동숭동 바탕골소극장에서 한국민속극연구소 주최로 <해범 김광석 한국무예발표회>를 가졌다. 이를 계기로 학계와 문화계에 전통문화로서의 십팔기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책이 세상에 나가고 신문과 방송을 통해 십팔기가 우리의 전통문화라는 사실이 조금씩 알려지자, 먼저 대학생들이 동아리를 결성하여 해범 선생에게 가르침을 청하게 된다. 이후 10년 동안 그들을 지도하는 한편, 십팔기 전 종목을 각론으로 해제한 《권법요결》《본국검》《조선창봉교정》을 펴내는데, 모두 이 방면의 우리나라 최초의 무예이론서들이다. 97년, 위 세권의 집필이 끝나자 해범 선생은 모든 것을 후학들에게 맡기고 도장을 접었다. 이후 동아리 졸업생들과 학자들로 구성된 <전통무예십팔기보존회>의 활동 덕분에 십팔기에 대한 세인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물론 학계의 관심을 유도하여 본격적인 전통무예 붐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임동규 선생이 감옥에서 혼자서 책을 보고 십팔기를 터득하여 복원했다고 주장하며 ´경당´이라는 무예단체를 만든다. 처음에는 ´십팔기´라는 말을 사용하다가 얼마 후, 느닷없이 ´24반무예´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최근에는 그의 제자가 독립해서 떨어져 나가 수원 화성에서 관광상품으로 자리 잡자 이번에는 ´24기´라는 용어를 퍼뜨리기 시작했다. 누구에게서 십팔기를 전승받은 것도 아니고 자의적으로 실기를 해석한데다, 그 명칭조차 왜곡함으로써 가까스로 제자리를 잡아가는 십팔기를 또 다시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그 외에도 70년대 중반을 전후해서 군에서 개발되어 사용해오던 ´특공무술´, 건강술인 ´단학´, 80년대 후반에는 ´기천문´ 등이 생겨나고, 90년대에는 중국과의 문호개방으로 ´우슈´, ´태극권´ 등 갖가지 중국무술이, 일본에서는 ´극진카라데´ ´거합도´ 등이 수입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해범 선생의 업적에 편성해서 ´본국검협회´ 등 유사 십팔기단체들과 그 연원이 불분명한 온갖 전통무예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전통의 단절로 인한 무예문화에 대한 무지와 잘못된 인식이 학계는 물론 무예계에 만연해 있다. 언제까지 저자거리 약장사나 사이비 종교처럼 굴러다니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무예계의 통렬한 반성과 함께 이제는 학계와 문화계에서도 이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가 병행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전통무예학을 제도권에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무예는 당대 최고의 과학이다. 거기에는 누천년에 걸친 조상들의 경험적 지혜와 정신이 녹아들어 있다. 국기 십팔기의 재정립이 체육, 예능, 의학, 민속, 역사, 철학은 물론 전통문화 콘텐츠로서 무궁무진한 자원이 된다는 사실을 새로이 인식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근자에 전 신정아 동국대교수의 가짜 학위가 들통 나면서 그동안 학력을 속여 온 많은 저명인사들이 망신을 당하는 사건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저자거리에서 생업으로 먹고 살기 위해 자신의 이력을 꾸미고 부풀리는 것에 대해서는 굳이 옆에서 공개적으로 떠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그로 인해 자신에게 피해가 없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 위조된 학위로 제도권으로 진입할 때에는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그건 공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만약 신정아, 김옥랑, 장미희 씨 등이 제도권(대학)으로 들어가지 않고 사설 미술관이나 극장으로만 전전했다면 아마도 지금은 물론 나중까지도 별 문제가 없을지도 모른다. 기껏해야 뻥친다거나 허풍떤다는 소리밖에 더 듣겠는가. 하지만 개인의 역사를 날조해서 제도권으로 들어간 것은 범죄에 해당한다. 사회의 기강과 제도를 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며, 누군가의 역할을 가로챘기 때문이다. 물론 본인으로서야 "비록 가방끈이 짧지만, 실력은 내가 더…"라고 항변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법이자 규칙이고, 사회적 약속이다.

모든 분야가 다 그렇듯이 무예계 역시 예외일 수는 없다. 검도, 태권도, 택견은 이미 제도권에 속해 있다. 더 이상 저자거리 약장사의 기예가 아니다. 그 연원을 ‘꾸밈없이’ 밝혀야 할 의무가 스스로에게 지워져 있다. 그리고 그 역사에 대해 어느 누구든지 의문을 제기할 권리 또한 있다. 지금 제도권으로 진입하려고 애쓰고 있는 무예종목들은 이 점을 분명히 해야 뒷날 망신당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가문이든, 나라든, 학문이든, 기업이든 각기 그 역사를 가르치고 배운다. 그것을 두고 전통이라 일컫는다.

굴곡 많은 현대사처럼 한국 무예계도 정신없이 흘러왔지만, 그래도 예전부터 하나의 불문율처럼 내려오는 관습이 있었다. 비록 오합지졸일지라도 같은 무예인으로서 서로의 허물을 나무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사 선량한 시민을 상대로 야바위를 친다고 해도(그런 일은 지금도 비일비재하다) 모두 각자의 생업인지라 이를 간섭하지 않고 애써 모른 척 했다. 하지만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구태를 벗어 던져야 제도권으로 진입할 수 있다. 특히 역사를 다룰 적엔 더욱 그러하다. 바른 역사, 바른 전통이라야 바른 정신을 계승할 수 있다.


<이 글은 인터넷 신문 데일리안에 연재중인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