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십팔기협회 :::


   
  세계의 문화유산, 국기 십팔기
  글쓴이 : 신성대     날짜 : 07-08-13 16:09     조회 : 5345    

전통무예연구가
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전통무예십팔기 보존회 회장
국군전통의장대 십팔기 사범
인터넷 신문 [데일리안 경기] 논설위원


십팔기는 동양 3국 최고의 무예 체계이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항상 자기의 무예가 최고라고 이야기한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흔한 말로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기에 다른 나라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서로 겨루어 우열을 가리는 일도 가능하지 않다. 호랑이와 사자 중 누가 더 셀까? 하는 이야기와 똑같다. 서로의 장단점이 다르고, 활동 무대나 처해진 상황 및 주위 환경에 따라 결과가 다르기 때문이다.

전통 무예 역시 그 나라의 전통 문화를 바탕으로 생겨난 것이기에 서로 비교하기가 쉽지 않다. 설령 전쟁에서 이기고 졌다 하더라도 반드시 무예의 우열 때문에 승부가 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군대의 규모나 전략, 군대의 사기, 전투 경험, 지형, 날씨 등등 변수가 너무나 많은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양 3국에서 유독 십팔기가 가장 우수한 병장 무예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먼저 십팔기가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임진왜란이 있었다. 임란 때 조선(朝鮮), 왜(倭), 명(明) 3국의 군사들이 한반도에서 전투를 치르면서 각 나라의 모든 무예가 한꺼번에 회돌이를 치게 된다. 전쟁이 끝난 후, 선조의 명으로 《무예제보(武藝諸譜)》를 펴내면서 6기(六技)가 조선의 병장 무예로서는 최초로 체계화되었다.

선조실록에는 한창 전쟁 중일 때, 왜병 포로들 중에서 검술에 재주가 있는 자들은 훈련도감에서 별도로 차출하여 조선군의 검술교련관으로 이용하라는 명을 내리고, 또 이를 수차례 확인하고 독촉하는 기록이 나온다. 왜군의 검술이 조선군에 녹아들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실제로 큰 전쟁을 통해 3국의 무예가 한꺼번에 펼쳐진 이후, 본래의 우리 무예와 주변국의 모든 무예를 서로 견주어 장단점을 살펴서 가장 효율적이고 이상적인 기예들만을 추려 체계화한 것이 바로 십팔기이다. 당연히 가장 우수하다고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현대 전쟁에서도 온갖 최신 무기와 전술이 실험적으로 사용되고, 이를 바탕으로 더 나은 무기들을 개발하지 않는가.

 
◇ 십팔기 교본 《무예도보통지》의 정조 서문. "현륭원(사도세자)의 뜻에 따라 십팔기의 명칭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라고 하여 고유명사로서 국기 십팔기의 명칭을 분명히 하고 있다. 
《무예제보》의 6기는 명(明)나라 장수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토대로 만들었다. 《무예도보통지》에 그 내력이 소상히 밝혀져 있다. 척계광은 산동성 인근의 해안 지방에 출몰하는 왜구를 물리치는 데 수없이 많은 공을 세운 장수였다. 그가 만든 병서인 《기효신서》에 실린 6기(곤봉, 등패, 낭선, 장창, 당파, 쌍수도)는, 왜구와 싸우는 과정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들을 물리치기에 가장 효율적인 무예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왜병과 싸우던 조선군에서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시급하고 적합한 무예였기에 서둘러 받아들인 것이다. 이후 모든 조선군은 이 6기를 체계적으로 익혀 왜구들을 잘 방어해 왔다.

이 6기(六技)가 만들어진 과정을 두고서, 사람들이(심지어 학자들까지도) 흔히 십팔기는 그저 중국 것이라고 단정 짓고 폄훼하려 든다. 문화에 대한 기초적인 개념조차 없는 데서 온 무지한 소치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전통 문화(우리 문화)라 하면 우리가 만든, 그래서 우리에게만 있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어떤 것, 즉 고유문화한 그 무엇을 의미하는 줄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문화에 대한 약간의 상식만 있더라도 세상에 그런 고유문화란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가 있다. 우리 문화, 아니 지구상의 어떤 문화가 진정으로 고유한 것인가 찾아보라. 문화란 끊임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뿐만 아니라 습합과 변질되는 과정을 거치기 마련이다. 필요에 의해 스스로 받아들였던, 혹은 강제로 심어졌던 이 땅에서 수백 년을 흘러왔다면 그것은 당연히 이 땅의 전통 문화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무예제보》의 6기는 분명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전적으로 참고해서 만들었다. 아니 거의 그대로 옮겨 놓았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의 6기가 명(明)의 그것과 결코 똑같았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기효신서》에 실려 있는 무예들은 그 실제 연결동작(투로, 연보 혹은 총도)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각 무예의 기본 세명(勢名)만을 나열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 세(勢)를 가지고 각자 자기 나라 실정에 맞게 기예를 짜는 것이다. 또는 그동안 두서없이 전해 오던 무예 실기를 이 세명을 빌려 체계적으로 정리하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같은 세명을 가지고 기록된 두 기예가 있다 해도 그 둘이 반드시 똑같은 것만은 아닌 것이다. 이를테면 한자(漢字)를 가지고서 중국사람, 한국사람, 일본사람이 각자 자기 시(詩)를 짓지만, 한자로 쓴 시라 해서 모두 중국시라 이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자기 문화를 하찮게 여기고 비하시키는 것은 과거 사대주의 혹은 식민지 피지배 근성의 비뚤어진 발로라고밖에 볼 수 없다.

그러다가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고, 1636년 다시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 북쪽에서 만주족들이 쳐들어오자, 그동안 왜구를 상대하던 6기만으로 그들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긴 칼을 잘 다루던 보병 위주의 왜구에 비해, 북방 오랑캐들은 기마전술을 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월도(月刀), 협도(狹刀), 편곤(鞭棍), 죽장창(竹長槍) 등 긴 병장기를 다루는 기예가 필요했던 것이었다.

병란 후, 그 경험을 살려 북방 오랑캐를 대항해서 이번에는 완전히 새로운 12기를 창안하여 먼저의 6기에 보태니 이것이 바로 ´무예십팔반(武藝十八般)´, 즉 ´십팔기(十八技)´이다. 바야흐로 2백여 년 간의 전쟁 경험을 통해 무비에 힘쓴 결과, 조선은 독자적으로 무예를 창안해 낼 정도의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효종의 북벌 의지를 계승하여 영조 35년(1759) 사도세자가 임시로 대청할 때 그의 명(命)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또한 십팔기의 일부 종목을 마상(馬上)에서 운용하는 기예(騎藝) 4종도 개발하였다. 그후 조선은 남쪽과 북쪽 이민족의 침입을 잘 막아왔다. 그리하여 조선은 동양 3국, 나아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훌륭한 종합 병장무예 체계를 갖추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정조의 명으로 만든 십팔기 교본 《무예도보통지》는 동양 3국은 물론 세계 유일의 고대 종합병장무예교본으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팔만대장경》《직지심경》 귀중한 줄은 알면서도, 정작 세계적인 보물인 ‘십팔기’와 그 교본인 《무예도보통지》의 가치를 몰라보고 있으니 심히 안타까운 일이다.

중국이나 일본에도 전통무예가 지금까지 많이 전해 오지만 십팔기처럼 나라에서 만든 병장무예가 아니고 모두 각 문파나 개인이 만든 호신용 무예들이다. 이처럼 십팔기는 저잣거리나 어느 문중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민간 무예가 아니라 국가에서 만들고 공식적으로 이름 지은 ‘국기(國技)’이다. 이는 전 세계를 통틀어 유일무이한 일로서,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국가가 나서서 병장무예를 이처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정식 명칭을 부여한 예가 달리 없다. 따라서 십팔기만이 이 땅의 유일한 전통무예이자 정통무예임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史實)이다.

그렇지만 무예가 아무리 우수하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나라를 지킬 수는 없는 법, 부국과 강병 정책이 함께 이루어져야만 수준 높은 무예도 제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가 있는 것이다. 《회남자(淮南子)》에서 “전쟁의 승패는 정치에 달려 있다 兵之勝敗 本在於政”고 하였듯이, 일찍이 서양의 과학 문명을 받아들여 화약병장기로 빨리 전환하여 개방의 길로 나아갔더라면 근대사의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이 글은 인터넷 신문 데일리안에 연재중인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