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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과 무덕
  글쓴이 : 신성대     날짜 : 07-08-13 16:07     조회 : 5015    

전통무예연구가
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전통무예십팔기 보존회 회장
국군전통의장대 십팔기 사범
인터넷 신문 [데일리안 경기] 논설위원

종교와 전쟁은 인류 문명의 양대 산맥이다. 특히 전쟁은 파괴와 발전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역할을 하면서 인류 문화에 지대한 공헌을 해왔다. 큰 전쟁은 항상 크나큰 과학적 진보와 더불어 예술, 철학, 사회 제도 등에도 변화와 발전을 가져왔다.

무(武)는 당연히 현실주의다. 현실주의적 관점은 자연스레 전쟁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서 전쟁은 알력과 충돌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우선순위의 수단이 되었다. 인류학적 관점에서 보면 전쟁은 인간 본성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원시 인간, 아니 그 이전의 동물적 시절부터 DNA에 각인되어 왔다. 생물로서 원초적 본능, 즉 진화의 욕구이다.

자유란 권력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며, 그 누구도 국가와 군대의 힘 밖에서는 자유로울 수가 없다. 따라서 전쟁은 국민이 실존과 독립을 확보하기 위해 치러야 할 당연한 대가였다. 정치권력의 역할은 내적 차원에선 평화를 보장하는 것이고, 외적 차원에선 전쟁에 맞서는 것이므로, 결국 평화와 전쟁은 같은 것에서 유래한 것이 된다.

문학에서도 큰 전쟁 후에는 반드시 대작이 탄생하곤 했었다. 그리고 먼 후세대들에게도 전쟁은 예술 작품의 중요한 제재로서 끊임없이 기억되어 찬미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조선시대 고전소설에서부터 현대소설에 이르기까지 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은 수없이 많다. 특히 최근의 6.25 전쟁은 그 참혹함만큼이나 지금도 수많은 작가들에게 글쓰기를 강요하고 있다. 아직 그 한(恨)이 다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이런 작품들을 보면서 항상 아쉬운 점이 있었다. 대개 우리나라의 작품들을 보면 전쟁의 참혹상, 비틀린 인간상, 이념의 소용돌이, 가족의 붕괴, 가치관의 전복 등의 갈등 속에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양민 학살 등 전쟁의 비참함을 고발하여 더욱 뼈저리게 느끼도록 독자들에게 강요하고 있다. 소설을 다 읽거나 영화를 보고 난 후에는 감동보다는 왠지 묵직한 부담을 느끼곤 한다.

만약 우리가 문학이나 기타 예술에 대해, 사회나 역사에 대해 어떤 의무(때로는 목적)를 요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예술이 진(眞), 선(善), 미(美)를 선양하고, 가(假), 악(惡), 추(醜)를 구축하는 것일 게다. 더 나아가 가, 악, 추조차도 진, 선, 미로 승화해 내는 것이 예술의 미덕(美德) 아니겠는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전쟁과 평화》《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토지》《여명의 눈동자》《닥터 지바고》《태백산맥》 등의 작품들은, 전쟁과 격변기의 소용돌이를 도도히 흐르는 강물처럼 훌륭히 그려내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또한 대개의 현대소설들은 주인공들의 사랑과 갈등이 이야기의 큰 줄기를 이루고 있는 데 비해, 고전소설인 《삼국지》는 신의(信義)를, 《수호지》는 협절(俠節)을 미화하고 있다.

비록 전쟁을 소재로 하진 않았지만 《아라비안나이트》는 모험과 용기를, 《돈키호테》는 기사도 정신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프랑스의 위대한 작가 장 지오노의 《지붕 위의 기병》(1951)은 현대판 ´기사도적인 사랑´을 가장 잘 그려낸 걸작으로 손꼽힌다. 우연한 만남으로 길동무가 된 이탈리아의 젊은 귀족 앙젤로와 늙은 귀족의 어린 부인 폴린은 콜레라의 격류를 헤치며, 기병대의 추격, 강도와의 싸움 등을 겪는 일주일간의 모험을 함께하면서 죽음보다 강한 사랑을 싹틔운다는 줄거리이다. 아름답고 순수한 기사도적 사랑을 그린 이 작품은 영화로도 만들어져 많은 사랑을 받기도 했다.

그 외에 전쟁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 중 가장 인상 깊은 것으로는 미국의 남북 전쟁을 배경으로 한 대작 드라마 〈남과 북〉을 들 수가 있겠다. 전쟁치고 추악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특히 내전인 경우에는 그 참혹함과 한스러움이 다른 어떤 전쟁보다도 클 수밖에 없다. 같은 민족끼리, 같은 이웃끼리, 심지어 한 집 안에서조차 서로 총칼을 겨누어야 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적국과의 싸움은 피아간의 구분이 확실하고, 죽이는 명분과 죽임을 당하는 이유가 분명해서 한(恨)을 남기지 않는다. 그렇지만 내전의 경우 그 경계가 불분명한 상태에서(특히 민간인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싸우기 때문에 억지로 네편 내편을 갈라야 한다. 그 과정에서 억울한 죽음을 많이 만들게 된다.

미국의 남북 전쟁도 우리의 6.25 사변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내전이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전쟁의 포연이 채 가시기 전, 모두가 잊고 싶었던 그 참상을 남녀간의 애증(愛憎)을 소설적 바탕으로 삼아 적나라하게 그려낸 여성적인 작품이었다면, 〈남과 북〉은 남쪽과 북쪽의 명문가 출신인 두 주인공이 사관학교에서 만나, 이후 서로가 적군이 되었음에도 끝까지 변치 않는다는 신의(信義)를 중심으로 내전 이야기를 감동 깊게 풀어나간 남성적인 작품이다. 그렇지만 두 작품 모두 내전의 상처와 기억을 치유하고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는 데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동안 몇 차례 소설과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하였지만, 월남전에서 패전한 이후 이를 소재로 한 영화는 미국에서 많이 나왔다. 초기에는 〈플래툰〉〈지옥의 묵시록〉〈디어 헌터〉 등의 명작들이 나와 이상한, 혹은 추악한 전쟁으로서의 월남전을 고발하고 있다. 당연히 미국 내에서도 월남 참전 용사들은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했다. 명분도 약한 전쟁에서 패배하기까지 했으니 그 치욕스러움을 말로 다할 수 없었다. 월남전에서 전사했다거나 다쳤거나 무공훈장을 받았어도 하나도 자랑스럽지 못하고, 주위의 눈총을 받으면서 주눅 든 채로 살아야 했다.

그런데 이런 아픔의 기억이 희미해질 때쯤에서 나타난 〈람보〉는 상황을 하루아침에 뒤집어 버렸다. 그야말로 영화처럼. "비록 패전하였으나 우리는 떳떳하다. 우리는 국가의 부름에 목숨을 바쳐 충성했다. 왜 우리를 무시하고 멸시하느냐. 아직도 우리는 미국을 사랑한다. 미국을 믿는다. 국가의 부름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목숨 바치겠다. 우리가 미국을 사랑하는 만큼 국가도 우리를 버리지 말아 다오." 뭐 대충 이런 이야기에, 흔해빠진 아이러브아메리카풍 영화다.

그렇지만 이 오락 영화 한 편으로 역사상 가장 치욕스런 패배를 당한 수치스런 전쟁을 비록 자랑스럽지는 못하지만, 결코 부끄럽지 않은 당당한 전쟁으로 이미지를 바꿔 버렸다. 다음날부터 그동안 숨죽여 살던 미국의 월남 참전 용사들은 장롱 속에 깊숙이 숨겨두었던 훈장을 꺼내어 가슴에 달고서 술집을 당당히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는 전쟁의 참혹상을 이야기로 남겨 후세에 전해야겠지만, 또 누군가는 그 상처를 치유하고 감싸 주는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남과 북〉과 〈람보〉는 새삼 예술의 위대한 힘을 실감케 한다(두 작품의 예술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미국의 힘이다.

문학을 한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글을 다루는 일이므로 여기에 종사하는 사람은 자연적으로 문(文)의 성향을 가질 수밖에 없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선비는 곧 문인(文人)이라는 등식이 굳어져 있어, 작가는 당연히 선비적이어야 하고, 작가 정신 또한 문(文)의 정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까닭에 대부분의 한국 작가들은 무(武)에 대한 개념 혹은 이해가 부족하기 짝이 없다.

심지어 무예에 대한 상식조차 부족하여 소설이나 드라마 혹은 영화에서 전쟁 장면이나 무예실기 동작을 묘사할 때엔 자못 황당하여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하긴 일반 독자들도 무예에 대한 상식이 없으니 감상하는 데에 별 문제될 것은 없다. 하지만 작품의 소재로서 무예에 대한 황당한 묘사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야기가 주제에 이르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무(武)의 문화에 대한 이해가 전무하다 보니, 당연히 무(武)의 정신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단지 소재로서만 이야기를 꾸려 나간다는 점이다. 그래서 작품을 다 읽고 나면 꼭 뭔가 허전한 구석이 남는다. 음식으로 치면 소금이나 양념이 한 가지 빠진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가령 최초로 관객 1천만 명을 돌파한 전쟁 영화다운 전쟁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우리들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던가?

전쟁의 참혹상, 동족상잔, 형제애? 어떻게 해서든 개죽음을 면해 한 명이라도 살아남아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가족을 책임져야 하고, 대를 이어야 한다. 이밖에 다른 무엇이 있던가? 전투 장면이 드디어 할리우드 수준으로 올랐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플롯을 따랐지만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뿐이다. 고발문학, 고발예술에서 조금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전쟁 영화라면 누구나가 상상하고도 남는 상투적인 이야기들이다. 다큐멘터리 영화가 아닌 다음에야, 고발 영화가 아닌 다음에야, 그래서 오락 영화라 해도 무언가가 부족하다. 《여명의 눈동자》 《태백산맥》 등등 비록 전쟁을 소재로 하였지만 결국 질긴 사랑, 이념 갈등을 치열하게 부각시키기에만 집중하다 보니 예술적 멋(맛)을 내는 데는 부족한 감이 없지 않다.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이왕이면 맛을 살리면서 작품을 완성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항상 남는다.

그 맛을 내는 양념(때로는 주제)이 바로 무덕(武德)이다. 무협이든, 전쟁이든, 조폭이든, 연애든, 오락이든 항상 이 덕(德)을 깔고 나갔으면 보다 깊은 맛을 냈을 것이다. 그게 예술이 아니던가? 다행히 근자에 들어 여인의 치마폭을 벗어나지 못하던 사극 드라마가 조금씩 무협적인 요소를 가미해서 배경 무대를 넓혀 시청자들을 시원하게 해주고는 있다. 하지만 아직 온전한 무(武)의 멋을 살리는 데까지는 한참 미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최근 1세기 동안 선진국들이 수백 년에 걸쳐 경험한 갖가지 사건과 변화를 그야말로 온몸으로 부대껴 왔다. 그만큼 상처도 많고 한(恨)도 깊다. 하지만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지고, 강철은 두드릴수록 강해진다고 했다. 다른 어떤 민족보다도 격렬한 시련을 겪고 또 극복해 낸 우리 민족이 이 상처를 잘 치유하고 맺힌 한(恨)을 풀어낼 수만 있다면, 지구상 그 어느 민족보다도 강해질 수 있지 않겠는가.

역사적 진실을 고발하고 예술적 정감에 호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왕이면 더불어 덕(德)을 세워 주는 문학이었으면 좋지 않을까. 충절(忠節)은 고전 소설에서나 그려지고, 신의(信義)가 조폭 영화에서나 반겨 주는 하찮은 것이 아니다. 덕의 예술, 덕의 철학, 덕의 교육이 절실한 시대이다. 그런 연후에야 덕의 정치를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대선 때가 되면 학자, 언론인, 방송인, 종교인, 문학인, 예술가는 물론이고, 연예인들까지 뒤질세라 특정 후보에 줄서기를 하고 있다. 그것도 노골적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권력화 시키기에 혈안이 되어가고 있다. 개인의 정치 참여를 나무랄 수야 없지만, 아무래도 집단적인 편가르기를 하는 것 같아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인생은 길고, 권력은 짧다? 그래서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것인가? 밑천 드는 것도 아니고, 발품 조금 팔면 되는데? 실력으론 최고가 못되니 권력에라도 가까이 붙어서 자신의 위상을 높여보고자 하는 욕망을 나무라고자 하는 말은 아니다. 떳떳하지 못하고 비굴해 보인다는 것이다. 호객꾼 노릇 하기보다는 직접 나서 당당하게 쟁취하라는 말이다.

<이 글은 인터넷 신문 데일리안에 연재중인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