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십팔기협회 :::


   
  십팔기의 전승계보
  글쓴이 : 신성대     날짜 : 07-07-23 14:38     조회 : 7222    

◇ 국립민속박물관 주최 <2002년 개천절 기념 해범 김광석 한국무예발표회>

신성대
전통무예연구가
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전통무예십팔기 보존회 회장
국군전통의장대 십팔기 사범
인터넷 신문 [데일리안 경기] 논설위원


조선 말, 을사조약과 함께 조선군이 강제 해체되면서 조선의 국기였던 십팔기도 함께 역사의 그늘로 사라지는 운명을 맞는다. 십팔기를 익히던 대부분의 군인들은 의병으로 싸우다 죽어가고 또 일부는 산으로 숨어들게 된다. 그리하여 일제 치하에서는 십팔기를 입에 담을 수조차 없게 되고 대신 그 자리에 유도, 검도로 대표되는 일본 무도가 강제로 이식되기 시작하였다.

그 이름만 전설로 남아 전해지던 십팔기가 이 땅에 다시 나타나게 된 것은 해방과 6.25가 한참 지난 69년, 김광석 선생이 우리나라 최초로 십팔기도장을 열면서였다. 한국 현대무예사의 산 증인이기도 한 그는 일평생동안 오직 무예의 길만을 걸어왔는데, 특히 십팔기의 유일한 전승자로서 이를 지키고 보급하는데 일생을 바친 분이기도 하다.

해범(海帆) 김광석(金光錫) 선생이 어린 시절, 그의 가족들은 전쟁에 광분하던 일제 말기 세상이 혼란스러워지자 한동안 지리산 골짜기 문암(門岩: 장흥군 위치면, 화순군 도암면, 나주군 다도면의 경계 지역으로 원래부터 마을이 있었던 곳이 아니라서 정식 지명은 아니다. 지금은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이란 곳으로 들어가 살고 있었다.

더불어 그 집안(道家)의 내력으로 인하여 수양에 필요한 여러 가지 공부를 하던 중 양생법과 간단한 무예를 연마하여야 했다. 그 시절에는 그의 집안과 왕래하던 여러 수양하는 지인들이 왜경과 일본군을 피해 그곳으로 숨어 들어왔었다고 한다. 그 사람들 중에는 훗날의 6.25 피난 시절 부산에서 만나게 되는 오공(晤空) 윤명덕(尹明德) 선생도 있었다.

오공 선생의 생존 연대는 정확치 않으나, 해범 선생이 16세 때 부산에서 다시 만났을 무렵 환갑을 넘기셨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미루어 1890년 전후에 태어나신 걸로 짐작된다. 당시 오공 선생은 항상 일본군과 왜경을 피해다녔던 분으로 기억되고 있다. 6․25 동란 때에는 부산으로 내려와 아미동 뒷산(천마산: 당시 그곳에는 화장터가 있었고, 그 일대가 일본인들의 공동 묘지였었다)의 큰 일본인 가족 묘지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스무 명 남짓의 전쟁고아들을 모아 돌보고 계셨다고 한다.

그러다 혼자 피난 온 해범 선생을 발견하고는 막무가내로 붙들어 함께 살게 했다. 당시 해범 선생은 미공보 관저에서 편하게 지내고 있었지만, 그 편한 거처를 두고 피난민 천막촌에서 사는 것이 영 내키지는 않았으나, 문중 어른이시라 딱히 거절도 못하고 꼼짝없이 4년을 함께 지내게 되었다.

낮에는 먹고 살기 위해 뛰어다니고, 늦은 밤과 이른 새벽이면 어김없이 해범 선생을 데리고 뒷산(천마산)으로 올라가 무예를 익히게 하였다. 그때마다 오공 선생은 항상 ‘십팔기’를 말씀하셨지만 당시에는《무예도보통지》란 책도 없었으며, 오직 구전심수(口傳心授)로만 무예를 익혔다고 한다. 그곳에서 십팔기를 비롯한 무예 전반에 대한 이론과 실기, 그리고 수양에 필요한 여러 가지 양생법과 한약학을 반강제로 가르치셨던 것이다.

십팔기 전 종목을 모두 익히지는 못하고 <예도> <본국검> <장창> <장봉> <월도> 등은 이름과 함께 기억하지만, 일부 종목인 <낭선> <죽장창> 등은 무기도 없었을 뿐더러 별도로 익힌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한다. 십팔기 이외에도 검법, 창법, 봉술 등 갖가지 기예와 무예이론들을 가르치고 알려주었으나, 당시의 형편이 여의치 않아 기록으로 남길 수도 없었고, 또 어린 마음이라 귀하게 생각지도 않아서 흘려들은 것도 많았다고 한다.

훗날 기억하기로 당시 십팔기를 비롯해 포승줄 감아 던지는 것 등을 보여주셨던 것으로 봐서 당신께서 젊은 시절 잠시 구한말 무관을 지냈거나, 무관을 지낸 분으로부터 기예를 배우지 않았나 짐작된다고 하였다. 집안 내력에 대해서는 외가의 먼 친척뻘이 된다고 해서 어렸을 적에는 ‘외삼촌’이라고 편하게 불렀던 기억 밖에 없다고 한다.

신체는 매우 건장하셨고, 한학과 무예에 깊은 조예를 지닌 분이셨는데, 왜 평생을 일본군과 왜경을 피해 다녔는지 자세히 물어보지 못했다고 해범 선생은 회고한다. 어렸을 적 지리산 골짜기에 들어와 지내던 대부분의 인사들이 다 왜놈들을 싫어했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단다. 또한 이전에는 스님이 아니었으나, 부산에서 만났을 적에는 스님이셨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 오공 선생은 해범에게 함께 산으로 가 수양의 길로 갈 것을 몇 번이나 권했으나, 한창 혈기 넘치던 해범 선생은 이를 거절하고 서울로 올라와 살게 되었다. 나중에라도 오공 선생을 다시 뵙게 되리라 생각했으나, 아쉽게도 이후 다시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또 해범 선생의 모친도 일찍 돌아가신지라 더 이상 오공 선생에 대해 알아볼 길이 없었다고 한다.

서울로 올라와 사업에 크게 성공하고 학생 운동에도 가담했던 해범 선생은, 5.16 군사 혁명이 일어나던 해에 돌연히 모든 것을 정리하고, 옛 문중 어른들을 찾아 전국 산천을 유람하며 한동안 수양의 길로 접어들었다. 6여 년 동안 수행하던 해범 선생은 다시 서울로 올라와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수년 동안 지금은 대부분 타계한 여러 무예인들과 왕래하며 서로 교유하였다. 마땅히 수련할 만한 장소가 없어 지인들의 태권도장이나 중국무술도장을 빌려 운동을 하던 해범 선생은 1969년 우리나라 최초로 십팔기도장을 개원하여 후학들에게 무예를 가르치기 시작해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십팔기’란 이름은 오공 선생의 말씀에 따라 붙였는데, 나중에 《무예도보통지》를 구해 보고서야 스승의 가르침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전에 별도로 익히지 않았던 몇가지 장병기예들도 책을 보자 바로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서울역 바로 아래에 십팔기도장을 열어 후학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지만, 당시에는 무예계의 어느 누구도 ‘십팔기’를 우리 무예로 인정해 주지도 않았을 뿐더러 아예 우리 것에 대한 인식조차 없었다. 심지어 중국 무술로 오해하고 무시하기까지 했다. 물론 당시에는 세계적으로 쿵후(工夫)가 광풍처럼 유행하던 터라 대부분 중국무술이 아니면 배우려 들지를 않았다.

따라서 아무도 십팔기를 우리것으로 알고 배우러 오지 않았고, 대부분의 지망생들은 십팔기가 중국무술인 줄 잘못 알고 왔었다. 다만 연세가 많은 노인들이 간혹 십팔기 간판을 보고 찾아와 십팔기가 대단한 우리 무술이라며 반가워 한 적은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한국인이 운영하는 일부 중국무술도장들은 ‘십팔계’라는 간판을 내걸 정도로 우리무예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십팔기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무예에도 조예가 깊었던 해범 선생은 어쩔 수 없이 중국무술에서 가져온 몇 가지 권법도 함께 가르쳐야 했었다.

당시에는 길에서 조그만 작대기 하나 지니고 다니기가 두려울 만큼 삼엄한 독재정권 시절이라 각 도장에서는 감히 병장기를 가르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대개 권법만을 가르쳤다. 심지어 깡패들조차 주먹으로 싸웠지 흉기를 사용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어쩌다가 식칼이라도 휘두르게 되면 신문에 대문짝만한 기사가 실리고, 다음날부터 어김없이 전국적인 도검류 일제단속이 벌어지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십팔기에는 권법이 한가지 밖에 없었고, 모두들 호신용 권법만을 선호하였기 때문에 도장 운영을 위해서는 보다 많은 권법이 필요했다.

그래서 오공 선생에게서 배운 십팔기 이외의 몇 가지 권법과 시중에 퍼져 있는 권법(중국무술 도장에서는 이를 장권이라 불렀는데, 화교 무술인들이 모두 5,6개의 장권을 국내에 전파했다)을 모아 가르쳤고, 더하여 중국대사관 앞 서점에서 구한 권법 책들을 보고 해범 선생이 직접 7,8개를 소개했다. 물론 모두 해범식, 즉 십팔기식으로 고쳐서 가르쳤다. 십팔기의 병장술은 3,4단 이상 오래된 제자들이라야 배울 수 있었는데, 대개는 본격적으로 십팔기를 배우기 전에 기초적인 권법 몇 가지만을 익혀서 나갔다.

그러다가 70년대 중반, 일부 중국무술도장들과 합기도인들이 함께해서 <대한쿵후협회>를 만드는 것을 보고, 해범 선생은 십팔기의 보존을 걱정하여 사회단체 <대한십팔기협회>를 설립(76년 결성, 81년 등록)하였다. 이때 선생님을 따르던 약 절반의 중국무술도장들도 함께 대한십팔기협회에 가입했었는데, 이로 인해 중국무술도장에서 쿵후를 익힌 사람들에게도 한동안 대한십팔기협회의 단증이 발급되었었다. 물론 당시까지만해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십팔기를 중국무술로 오인하고 있었기 때문에 쿵후를 익히고도 십팔기단증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 이때문에 예전에 쿵후를 익힌 상당수의 사람들이 자신도 십팔기를 했다고 말하게 된 것이다. 모두가 역사의 굴곡과 전통의 단절로 인해 야기된 혼란이었다.

이후 약 15년 동안 나름대로 ‘십팔기’를 지키고 전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세인들의 잘못된 인식과 무관심을 바꾸기엔 역부족이었던 해범 선생은 1983년 그만 도장 문을 닫고 수양 생활로 접어들어 버렸다. 그리하여 십팔기는 몇몇 제자들이 운영하는 도장에 의해 간신히 명맥을 잇고 있었다. 그러다가 1985년 당시 문화재위원이었던 심우성(沈雨晟) 선생을 만나면서 해범 선생이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된다.

심우성 선생은 민속학자로서 오래전부터 우리의 전통 춤을 연구하기 위해 전통 무예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출판업자로 하여금 규장각에 있는 《무예도보통지》를 처음으로 영인케 했었다. 그리고 민속답사로 전국 방방곡곡을 다닐 때마다 ‘십팔기’를 하는 사람을 수소문했으나 만나지 못하다가 1985년에서야 우연히 필자와의 인연으로 해범 선생을 만나게 된 것이다.

십팔기의 전승 계보와 실기를 확인한 그는 해범 선생에게 그 실기를 세상에 공개할 것을 끈질기게 요구하였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무예도보통지 실기해제》(심우성 해제, 김광석 실기, 1987, 東文選)라는 책이다. 그리고 그해 12월 20일, 한국민속극연구소 주최로 서울 동숭동의 ‘바탕골 예술관’에서 출판기념회 겸 최초의 십팔기발표회를 공개적으로 가지게 되었다. 여기서부터 우리나라에 비로소 전통 무예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이 책을 만들 적에 해범 선생은 심우성 선생의 강권에 못이겨 대충 실기를 보여주어 사진을 찍게 하고 동작을 구술해 주는 것으로 번거로운 일에서 벗어나야지 하는 생각에서 한 일이었다고 한다. 어차피 다시 세상에 나가 후학들을 직접 가르치지도 않을 것이니, 그저 실기 동작을 책으로라도 알려 익히도록 해주자는 취지였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책을 본 서울대, 연세대, 서강대, 경북대를 비롯한 전국의 여러 대학 학생들이 동아리를 결성하여 찾아와, 십팔기가 이토록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인지 미처 몰랐다며 간곡히 배움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해서 주변의 여러 학자들과 제자들이 나서 신촌 로타리에 도장을 마련하고, 선생을 다시 나오게 만들었다.

비록 이렇게 해서 십팔기 간판을 다시 걸었지만 이때까지도 일반인들은 아무도 ‘십팔기’ 간판만을 보고는 배우려 들지 않았다. 도장 운영을 위해 한참 후 다시 ‘쿵후’를 써 붙이고서야 일반 수련생들을 받을 수가 있었다. 그렇지만 이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십팔기 전 종목을 가르치고, TV와 신문 등에 적극적으로 알리고, 대학생 동아리들이 전국연합회를 결성하여 각종 발표회와 대회를 개최하면서 십팔기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라는 사실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배우는 대학생 제자들은 모두가 학구파들이어서 그런지, 그냥 십팔기의 실기만 배워가는는 것이 아니라 이것저것 무예에 대해 질문을 해오기 시작했다. 이에 해범 선생은 자신이 일평생 전해 받고 터득한 무예 이론과 실기를 책으로 남겨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고, 그 결과로 나온 것이 십팔기 전 종목을 각론으로 해제한《권법요결》《본국검》《조선창봉교정》 등이다. 모두 우리나라 최초의 무예 이론서들로서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결코 뒤지지 않을 수준 높은 무예서이다. 이 책들의 집필이 끝나자 해범 선생은 모든 것들을 후학들에게 맡기고 번잡한 생활에서 벗어나고자 97년에 마침내 도장 문을 닫았다.

이후 그의 제자들에 의해 십팔기가 보급되어 오다가 2000년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전국적인 전통무예 붐이 일어나게 되었다. 더불어 선생의 저서와 공연을 보고 십팔기를 흉내내는 유사 십팔기 단체들도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예전에는 십팔기를 중국무술이라며 거들떠보지도 않던 이들조차 십팔기와 《무예도보통지》를 들먹이며 정통성을 주장하기까지에 이르렀다. 분명한 사실은 이 모두가 해범 선생이 일평생 십팔기를 지켜오고 보급한 덕분이다.

조선 왕조의 멸망과 일제 식민시대를 겪지 않았더라면 의당 십팔기는 국기로서 우리 문화의 중심에 우뚝 서 있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이 땅에 조용히 드러나지 않게 그 맥을 이어온 수양하는 가문, 즉 도가(道家)들이 있었기에 간신히 이어져 예까지 올 수가 있었다. 오공 선생이나 해범 선생 역시 무예인이기 이전에 도가 문중의 수양하던 사람들이다. 좀 더 자세히 밝히는 것은, 해범 선생께서 극히 내키지 않아 하는 터라 이 정도에서 그쳐야겠다. 조상의 이름을 팔거나 주변인들을 들먹여서 스스로의 이익이나 공명심을 취하는 일을 지극히 혐오하는 도가 사람들의 별난 심성들 때문이다. 그들은 이토록 세상에 드러나서 번잡스러워지는 것을 지극히 싫어했다.

그리고 해범 김광석 선생은 1992년 《권법요결》이라는 저서를 통해 북창(北窓) 정렴(1506-1549) 선생의 〈용호비결(龍虎秘訣)〉을 공개한 바 있다. 조선시대 기인으로 알려져 있는 북창 선생은 우리나라 도가 문중의 대표적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숱한 일화를 남겼으며, 〈용호비결〉이라는 우리나라 유일의 수단지도(修丹之道) 비결서를 남기기도 하였다. 해범 선생은 문중으로 전해져 오는 하나뿐인 이 비결서를 간직하고 있으며, 현재 이 수련법과 그 외의 여러 가지 양생법을 몇몇 제자들에게 전수하여 세상에 공개하기 시작하였다. 이 또한 앞으로 우리나라 양생문화에 크게 기여할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일제 식민시대를 거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십팔기가 해범 선생에 의해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 우리 모두는 또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정조 때의 《무예도보통지》를 통해 전통 무예 수준의 정점을 확인한 우리는, 이후 점차 그 효용 가치가 떨어지면서 무예 수준도 함께 낮아져 갔을 것으로 당연히 짐작해 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오늘날에 와서 해범 선생이 십팔기를 전하기 위해 무예 이론과 함께 그 실기를 각론으로 해제한 《권법요결》《본국검》 《조선창봉교정》을 보면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할 당시보다 더욱 발전된 내용임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 책들을 펴내기 위해 현대의 여러 무예서를 참고하기도 했을 터이지만, 그 내용들은 모두가 선생이 일생 동안 터득한 무예 이론과 오공 선생으로부터 구전심수(口傳心授)받아 온 것들이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우리는 무예 십팔기가 조선 후기에 도가 문중으로 들어가면서, 도가의 양생(養生), 건신(建身)술과 자연스레 결합하며 꾸준히 발전해 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 해범 선생의 세 권의 책 중 특히 《권법요결》에는 북창 선생의 〈용호비결〉을 비롯하여 많은 도가의 양생 이론이 첨가되어 있다. 모두 무예 수련에 지극히 도움이 되는 귀한 이론들이다.

고대로부터 우리나라에는 도가(道家), 무가(武家), 불가(佛家)를 구분하는 경계가 뚜렷하지 않았고, 상호 왕래 또한 많았다. 그러다 보니 도가(道家)에서는 수양의 방편으로 무예를 익혀왔는데, 건신(建身), 양생(養生) 분야에서 서로의 공통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오공 선생과 해범 선생 역시 도가 문중 사람들로서 무예를 익혀왔던 것이다.

그래서 해범 선생께서는 항상 제자들에게 무예를 수양의 방편으로 삼을 것을 강조해 왔으며, 무예로써 남을 이기려 하거나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어 기예를 팔아서 먹고 사는 방편으로 삼는 것을 심히 달가워하지 않았다. 오공 윤명덕 선생 역시 일평생 수양의 길을 걸으신 분으로, 해범 선생에게 십팔기를 전하면서 항상 그렇게 당부하였다고 한다. 해범 선생께서는 평소에 이같이 말하였다.

"십팔기가 단순히 도가 문중의 기예였다면 결코 세상에 내놓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내 것이 아니라 나라의 것이고,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십팔기가 제대로 서야 나라가 바로서고, 민족정신이 바로 선다. 제 것도 모르고서야 어찌 나라의 체통이 서겠는가!"

"십팔기는 나라에서 만든 나라의 무예이다. 때문에 이 땅의 사람이면 누구든, 그동안 무슨 무예나 운동을 배웠든 간에 먼저 자기 무예를 알아야 한다."

"그동안 배우고 익혀온 모든 이론과 실기를 책을 통해 다 공개했고, 또 많이들 배워 나갔다. 예전에 십팔기라면 코웃음을 치던 무예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인들조차도 이제는 십팔기가 우리 것인 줄 알게 되었으니, 내 할 일은 다한 것 같다."

<이 글은 인터넷 신문 데일리안에 연재중인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