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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도(劍道)와 왜검(倭劍)
  글쓴이 : 신성대     날짜 : 07-07-18 11:51     조회 : 7361    

신성대

전통무예연구가
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전통무예십팔기 보존회 회장
국군전통의장대 십팔기 사범
인터넷 신문 [데일리안 경기] 논설위원

고대의 검(劍)은 상무 정신의 상징으로 귀족이나 평민이 모두 좋아하는 무기였다. 왕이 신하에게 봉책을 내릴 때나, 절친한 친구들끼리 깊은 우정을 표시하는 데도 검을 선물하였다. 자신이 아끼는 검을 준다는 것은 "언제든 너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놓을 수 있다"는 뜻으로 절대적인 신의(信義)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검을 잘 만드는 장인, 명검을 식별하는 사람들, 그리고 검을 잘 다루는 검술가가 배출되었다. 이런 호검기풍(好劍氣風)은 필연적으로 무사 계급을 탄생시켰으며, 사회에 숭검(崇劍) 심리를 보편화시켰다. 차츰 사람들은 검에 대해 신비감을 갖게 되고, 검에는 초월적인 힘이 깃들어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대의 왕들은 명검을 만드는 데 엄청난 공을 들였다.

무예의 왕은 역시 칼이다. 오늘날에도 무예를 배운다고 하면 가장 먼저 칼을 배우고 싶어한다. 특히 개인 무예에서는 칼을 빼놓을 수가 없다. 굳이 무예가 아니라도 칼은 석기시대의 돌칼에서부터 오늘날의 면도칼까지 우리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도구이기도 하다. 또 집집마다 몇 자루씩 있는 식칼을 비롯해 아무리 작은 공구용 칼이라 해도 능히 사람을 해칠 수 있기 때문에 항상 두렵고 조심스레 다루어야 할 물건이다.

때로는 여인의 정조를 지키는 호신용이 되기도 하고, 자객용이 되기도 한다. 지금도 회교권 일부 국가에서는 모든 남자들이 호신용으로 옆구리에 하나씩 걸고 다니기도 한다. 또 옛 그림에서 보듯 글 읽는 선비라 해도 항상 옆에 검을 두고 아꼈었다. 숭검(崇劍)을 통해 절제와 용기, 충절과 협의의 덕(德)을 닦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고대 국가 중 조선은 지구상에서 참으로 유별난 사회 체계를 가진 나라였던 것 같다. 광산이나 대장간, 즉 쇠를 다루는 일을 나라에서 직접 관장하거나 통제하였고, 유황 등 화약을 만드는 재료들의 거래를 엄금하였다.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무기 및 그 재료들의 개인 수요와 거래를 통제하였던 것이다. 쇠붙이를 모은다는 것 자체가 곧 모반을 꾀하는 일이었고, 벼슬하는 관리라 하더라도 집 안에 칼 한 자루 걸어 놓았다가는 언제 누명을 쓰고 멸문지화를 당할지 몰랐다.

설령 무반(武班)이라 해도 업무상 허락된 장소 이외에 사사로이 칼이나 어떤 종류의 무기도 소지하고 다니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사회였다. 그것이 바로 태조 이성계가 만든 조선이다. 어느 누구도 고려의 무신 정권처럼, 또는 자신처럼 왕조를 넘보지 못하도록 원천적으로 전 백성을 무장해제 시킨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조선의 선비문화, 즉 칼의 문화가 아닌 붓의 문화이다. 이런 전통은 오늘날에까지도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

문치에 관심이 많은, 글읽기를 좋아하는 왕이 나오면 성군이라 입이 마르도록 칭송하고, 이를 조금이라도 소홀한 왕이 나오면 요순공맹(堯舜孔孟)의 거미줄을 내뱉어 책상 앞에 꽁꽁 묶어두어 등창이 나서 죽거나 말려죽게 하였다. 간혹 활달한 성격의 왕이 나서 무예나 사냥에 관심을 가질라치면 성군의 자질이 없다거나, 심지어 폭군이라 해서 내쫓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왕이 왕답지 못하고 문신들의 끝없는 입씨름에, 흡사 요즈음의 우리나라 정치판처럼 왕조가 점점 시들어 갔다. 태조 이성계도 아마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고려 무신의 칼보다 조선 문신의 세 치 혀가 훨씬 더 무서울 줄은. 덕분에 고대 국가 중 조선 왕조만큼 치안이 잘된 나라도 없었다. 선비가 혼자서 아무 무기도 없이 전국 어디든지 돌아다녀도 괜찮은 나라가 또 어디 있었던가.

 
 

이렇게 오랫동안 칼을 멀리하다 보니 우리 민족에게 칼은 왠지 섬뜩하고 화를 불러올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을 가지게 했다. 말발굽 소리는 오랑캐, 칼은 왜구의 침략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그것을 결정적으로 각인시킨 사건이 바로 구한말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다. 단 한칼로 5백 년 동안을 말싸움으로 지새우던 선비들의 입을 일시에 다물게 해버렸다. 그때 다물어진 입들은 해방이 되자 일시에 터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도저히 시끄러워서 못 참겠다며 머리 위로 공포탄 한 방 쏘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그게 5.16 군사혁명이다. 그러다가 80년 갑자기 떨어져 나간 재갈. 이번엔 공포탄에 안 속는다. 12.12 군부반란, 그리고 5.18 군부만행, 결국 실탄으로 재갈을 다시 물렸다.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그동안 쌓인 말의 봇물이 일시에 터져나온 것이다.

일제의 식민치하에서 우리의 무예는 명맥이 끊어지고 대신 그 자리에 일본 무예가 강제로 이식되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이러한 무예의 이식을 문화정치 차원에서 자행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유입된 무예가 검도, 유도, 가라테, 합기도 등으로서, 이들은 일제치하에서 태동하여 해방을 거치면서 그대로 남아 한국 무예인 양 기능하게 되었다.

이렇듯 식민지 지배로 인한 일본 무예의 한국 유입은 해방 이후 한국 무예의 전개 양상에 커다란 문제를 야기하게 되었다.일본의 식민지 교육의 일환으로 행해진 체육 교육은 일본의 군국주의 야욕과 맞물려 병식 체조, 형식 체조 중심으로 행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체육은, 일군(日軍)은 물론 학교에서도 국방력 강화를 위해 행해졌다.

현재의 검도, 유도 등도 그 당시부터 행해졌는데 초기에 검도는 격검으로, 유도는 유술로 불려졌다. 학교체조교수요목(學校體操敎授要目)의 제정(1914)에는, 격검 및 유술에 대하여 종래의 방식에 의거하여 행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또한 체조 교수 시간 외에 행해야 할 종목에서도 격검 및 유술 등의 종목을 행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또한 학교체조교수요목의 개정(1927)에서도 검도 및 유도(격검과 유술에서 검도와 유도로 그 명칭이 바뀜)를 적당한 방법으로 가르친다고 명시하고 있다.
1937년에 개정된 학교체조교수요목에서도 ´검도 및 유도에 대해서 적당한 기회에 강화(講話)를 행하여 실제의 수련과 상부(相扶)하여 그 효과를 힘씀´이라고 하여 지속적으로 무도 교육을 실시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일제치하에서의 무예는, 일본의 식민지 교육의 일환으로 자신들의 군국주의적인 야욕과 함께 우리 민족의 의식을 일본 무도를 통하여 지배하려는 의도로 실시되었다. 1904년 육군연성학교에서 검술(격검)이 행해졌고, 1916년 사립 오성학교 등에서 검도를 지도하였으며, 1921년에는 조선무도관이라는 사설도장에서 검도를 가르쳤다. 일제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러한 검도는 어디까지나 일본에 의해서 전래된 일본인의 민족정신으로 무장된 일본의 무예일 뿐이다.

검도는 일본의 국기이다. 현재처럼 경기체육화한 검도에는 무예로서의 기예는 거의 없어졌지만, 결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다. 칼(刀)은 일본의 민족정신, 즉 대화혼(大和魂)을 상징한다. 그들은 수천 년 동안 칼을 숭배해 온 민족이다. 칼은 그들의 정신이자 자부심이며, 힘의 원천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일본도(日本刀)는 공포와 굴종의 상징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겐또(劍道)가 해방 후에도 계속해서 이 땅에 남아 있다.

인왕산 꼭대기의 쇠말뚝도 뽑아내고, 총독부 건물도 부수어 버렸지만, 명성황후 가슴에 꽂힌 칼은 아무도 뽑아내지 못하고 있다. 뽑기는커녕 지금까지 그 영화를 누려온, 친일파들의 특권을 물려받았음을 상징하듯, 아니면 친일의 기득권을 보호하듯 시퍼런 칼날을 번뜩이고 있다. 일본을 흉내내며 일본 정신으로 극일(克日)을 하겠다는 것인가. 두 손으로 시퍼런 칼을 잡고 떡하니 버텨 서서 목에 힘주면 일제 때 지배자의 기분이 느껴지는가. 혹여 무의식 중에 지배자의 근성이 피지배자에게로 전이된 것은 아닌지?

도대체 우리 조상들이 언제부터 치마바지 입고 죽도를 휘둘렀는지 모르겠으나, 딱하게도 현재 시중에 나온 검도에 관한 책이나 논문들을 보면 하나같이 검도의 뿌리가 원래 한국에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다른 식민 무예계의 주장과 다름없이 삼국시대에 일본에 전해진 검도가 체계화되고 더욱 발전되어 일제 때 역수입되었다. 다시 말해 제 고향을 찾아온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곧 우리 것이라는 황당하고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나 더욱 한심한 일은 이런 어처구니없는 논리가 무예계뿐만 아니라 일반인은 물론 일부 지식인들에게도 아무런 의심 없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지고 있어, 학계에서도 이런 상식 이하의 주장이 실린 논문들이 계속 쏟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같은 논리로 보면, 오늘날 대부분의 일본문화는 원래 한반도에서 전해진 것이니 굳이 왜색 문화라 하여 배척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식민 지배 시절 일본이 주장하던 ´대동아(大東亞)´ 논리와 다를 바가 없는, 자발적 피지배근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식민지배를 당했던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하지만, 실로 문화적 소양을 의심치 않을 수 없는 한심한 노릇이다. 조선시대에 <왜검(倭劍)>을 받아들일 때에도 그런 변명은 하지 않았다. 그 연원을 정확하고 소상하게 밝혀놓고 있다.

십팔기에는 일본에서 들여온 무예 두 종목이 포함되어 있다. <왜검(倭劍)>과 <교전(交戰)>이다. 임진왜란을 겪고 나자 조선은 이제까지 무시해 왔던 왜구의 검술을 제대로 연구해서 대응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숙종 때 군교(軍校) 김체건(金體乾)이 사신을 따라 일본에 들어가 검보를 얻어와서 그 검술을 배웠는데, 여기에 새로 교전보(交戰譜)를 만들어 추가 하였다고 했다.

십팔기를 만들 당시 왜국의 것을 받아들여 온전히 우리의 것으로 새로이 만들어 낸 것이다. 다시 말해 십팔기 중의 <왜검>은 우리가 필요해서 능동적으로 받아들여 온전히 우리 것으로 새로 만든 조선의 무예 가운데 하나이다. 당연히 식민지 지배 수단으로 강제로 이식된 ´겐또(劍道)´와는 전혀 다르다.

더 정확히 말해서 지금의 ´검도´는 이미 무예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간, 경기체육화로 개량된 스포츠이다. 오직 격법(擊法) 한 가지만으로 누가 먼저 머리, 허리, 손목을 맞히느냐로 승패를 가리는 스포츠에 다름 아니다. 무예로서의 법식(法式)은 거의 없어졌다. 그리고 일본정신만이 있을 뿐이다. <왜검>은 우리정신으로 만들었지만, 지금의 검도에는 결코 우리정신이 없다. 검도정신을 우리정신인줄 안다면 그건 착각이다. 피지배자였으면서도 지배자인양 여기는 정신이상증세에 지나지 않는다. 숭일(崇日)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요즈음 이 검도계에서는 전통 무예, 즉 십팔기 중 본국검 혹은 예도를 수련한다고 하는데, 전통적인 조선 검법(劍法)도 아니고, 일본의 겐또(劍道)도 아닌 기이한 동작이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다. 식민문화인지 전통문화인지 구분도 못하고 있다. <본국검>을 배우기 전에 먼저 <왜검>을 익히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그것이 전통과 우리정신을 잇는 일이다.

우리에게 검도는 분명 식민문화의 유산이다. 전세계에서 일본 다음으로 검도를 좋아하는 한국, 수시로 일본에 건너가 일장기 아래에서 죽도를 휘두르며 머리를 조아린다. 마치 아직 친일이 살아 있음을 고하는 모양새가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검도인들이 일본대사관 앞에 죽도 들고 몰려가서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거나, 종군위안부 문제로 흥분하는 장면이 쉽게 상상이 되는가? 그럴리야 없겠지만 만약 일본 검도가 올림픽 정식종목이 된다면 아마도, 아니 분명 유도처럼 일본 선수를 이길 수 있는 나라는 한국일 것이다. 이게 자랑일까? 아니면 식민지배의 흔적일까?

검도와 함께 들어온 유도는 당당하게 스포츠로서 그 연원을 숨기지 않는다. 그래서 세계인 누구나 원하는만큼 즐기고 있다. 유도를 한다고해서 충일(忠日)이나 숭일(崇日)이 되지 않는다. 다른 스포츠나 무예 종목들도 마찬가지로 그 연원을 숨기거나 역사를 왜곡하지 않는다. 그래서 떳떳한 것이다. 식민시대에 강제로 이식되었든, 필요에 의해 스스로 받아들였든, 부지불식간에 주고 받았든, 문화란 원래 그렇게 습합의 과정을 거치면서 변질되고, 발전되고 사라지기도 하는 것이다.

어떻게 들어왔든, 이 땅에 뿌리를 내려 백년이 가고 2백년을 흘러간다면, 그것이 곧 전통문화이다. 고유한 문화란 세상에 존재할 수가 없다. 그 연원이 부끄럽다하여 감추거나 고유한 것, 혹은 전통적인 것으로 꾸밀 필요도 없다. 그게 오히려 부끄러운 짓이다. 진정하게 역사를 사랑한다면, 지난 역사의 상처와 영광을 모두 있는그대로 안아야 한다.

식민지배의 상처를 극복하려면 먼저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저런 변명은 오히려 후유증을 길게 하는 것이다. 일본의 과거사 왜곡과 정신대 부정을 생각해 보라. 언제까지 그 찜찜함을 지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주체성과 정체성을 그렇게 세워가는 것이다. 이제 무예계가 긴 미몽에서 깨어나 민족의 자긍심과 웅지를 키우는데 당당하게 앞장을 서야 하지않겠는가.

확고한 중앙집권 체제와 5백 년씩이나 이어진 왕조의 안정된 치안 상태 때문에 조선은 개인 무예의 발달을 가져오지 못했다. 대신 십팔기에서 볼 수 있듯이 군사용 병장무예가 이를 대신하였다. 일반 병졸들과는 달리 한교, 백동수, 김체건 등 《무예도보통지》 편찬에 참여한 극히 일부 무관들의 예에서 보듯, 당시 조선의 병장 무예 수준이 동양 전체에 비추어 보더라도 어느 나라, 어느 문파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그만큼 국가적으로 지속적인 공력을 쏟아부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 글은 인터넷 신문 데일리안에 연재중인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