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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팔기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글쓴이 : 신성대     날짜 : 07-07-18 11:51     조회 : 7129    

◇ 십팔기 교본 <무예도보통지> 


신성대
전통무예연구가
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전통무예십팔기 보존회 회장
국군전통의장대 십팔기 사범
인터넷 신문 [데일리안 경기] 논설위원


나라가 있으면 의당 군대가 있고, 그 군대에는 반드시 여러 가지 무기를 다루는 무예가 있기 마련이다. 멀리 고조선에서부터 조선에 이르는 수천 년 동안 이 땅에도 그러한 무예가 없었을 리 만무하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래 문무겸전은 개인의 인격 완성은 물론 민족정신의 뿌리가 되어 왔다.

화랑을 앞세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고려시대 역시 무(武)가 성행하였으므로 당연히 무신(武臣)들이 국정을 주도하였다. 그러다가 과거제도의 도입으로 문무(文武)가 갈라져 무신난을 겪게되고, 원(元)의 지배하에 무장해제당하면서 무예의 긴 단절이 있었다.

고대에는 어느 왕조든 반드시 무(武)에 의해 세워질 수밖에 없었다. 역시 무력으로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철저히 억압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적 왕권을 확립한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을 겪고 나서야 무비(武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조선군의 무예 체계를 새로이 정립하게 된다.

전란이 끝나자 선조는 그때의 경험을 살려, 역시 왜구를 물리친 장수로 유명한 명(明)나라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를 토대로 6기(六技: 곤봉, 등패, 낭선, 장창, 당파, 쌍수도)를 만들고, 그 교본으로 《무예제보(武藝諸譜)》라는 무예서를 남긴다. 이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무예서이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우리나라 무예사가 시작된다. 이후 이 6기(技)를 익힌 조선군은 왜구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있었다.

한동안 평안했던 조선은 인조 14년(1636), 북방 오랑캐의 침입으로 정묘,병자호란을 연이어 겪게 되면서 무예 종목을 더 늘리고, 보다 정밀하게 체계화시켜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영조 35년(1759) 사도세자가 서무(庶務)를 섭정할 때, 신라의 화랑으로부터 전해 오던 본국검(本國劍)을 비롯하여 죽장창(竹長槍), 기창(旗槍), 예도(銳刀), 왜검(倭劍), 교전(交戰), 월도(月刀), 협도(挾刀), 쌍검(雙劍), 제독검(提督劍), 권법(拳法), 편곤(鞭棍)의 열두 가지 새로운 종목과 응용 종목으로 기창(騎槍), 마상월도(馬上月刀), 마상쌍검(馬上雙劍), 마상편곤(馬上鞭棍)의 네 가지 기예(騎藝)와 체계화시켜 앞서의 6기(技)에다 더하여 <십팔기(十八技)>를 완성한다.

이때 발간된 것이 《무예신보(武藝新譜)》이지만 지금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대신 《무예도보통지》에서 〈原〉항목만을 추려 뽑음으로써 유추해 볼 수 있다. 흔히 비운의 왕세자로 알려진 사도세자는 그동안 총명하지만 여린 왕세자로 알려져 왔는데, 혜경궁 홍씨가 만년에 《한중록(閑中錄)》을 통해 가엾고 애절하게 그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매우 건장하고 무예에도 조예가 깊어 커다란 월도를 휘둘렀을 정도였다고 한다. 십팔기를 만든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는 분명 부국강병을 꿈꾸던 훌륭한 왕세자였음이 틀림없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뜻에 따라 정조는 계속해서 무비(武備)를 다져나갔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가장 먼저 십팔기를 시취(試取)토록 하였으며, 이를 보다 체계적으로 해석케 하였다. 또한 부록으로 마상재(馬上才)와 격구(擊毬)를 추가하여 교본으로 남기니, 그것이 바로 우리 무예의 족보라 할 수 있는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이다.

《무예도보통지》에 나열된 무예 명칭과 순서를 살펴보면, 마상 4기 중 유독 기창(騎槍)만이 독립적인 명칭을 가지고 있다. 즉 마상장창(馬上長槍)이라 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이전부터 기창(騎槍)이란 명칭을 줄곧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장창 바로 뒤에 싣지 않고 죽장창, 기창, 당파에 이어서 실은 것은, 곧 말 위에서 장창뿐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창들을 운용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쌍검에 이어 마상쌍검, 월도에 이어 마상월도, 편곤에 이어 마상편곤을 붙인 것은 그것들이 독립적인 기예(技藝)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기예(騎藝)로서 응용 종목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서문에서도 ´기예(騎藝) 등(等) 6기(六技)´라고 하여 이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 만약 독립된 종목이었다면 뒤쪽에 별도로 묶었을 것이다. 맨 마지막의 격구와 마상재는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던 군사 오락으로서 부록한 것이다.

근자에 들어 이 십팔기에다 마상 기예(騎藝) 4가지와 격구, 마상재를 합쳐 <24기>니 <24반>이니 하는 무예단체들이 생겨나, 마치 24기가 전통 무예의 명칭인 양 호도하고 있다. 이는 매우 잘못된 것으로 조선 국기의 공식적인 무예 명칭은 어디까지나 <십팔기>이다. 《무예도보통지》 서문에 이를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본문에서도 재차 확인해 주고 있다. 단지 십팔기 중 네 가지를 말 위에서도 시연할 수 있도록 추가한 것이다. 그 네 가지 기예(騎藝)는 정식으로 독립된 무예 종목이 아닌 십팔기의 응용 종목일 뿐이다.

다른 기예도 마상으로 올려서 이를 얼마든지 늘릴 수 있지만, 아무리 종수를 늘려도 역시 십팔기에 속한다. 설령 소(牛)나 전차 위에서 시연하여 36기, 72기로 늘린다 해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십팔기를 보다 체계적으로 보전하기 위해 만든 《무예도보통지》를 펴내면서 부록으로 실은 마상재와 격구는 무예가 아닌 고려 때부터 내려오던 군사 오락 종목이다.

지금도 7,80대 어른들은 모두 <십팔기> 혹은 <무예십팔반>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왕조실록이나 그외의 여러 문헌과 문학 작품 속에서도 항상 <십팔기>로 그 명칭을 확실히 하고 있다. 반면에 24기는 이후 어떤 문헌에서도 단 한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마상무예> <24기> <24반>은 불과 수년 전부터 전통 무예붐을 타고 생겨난, 십팔기를 흉내내는 무예인들의 단체명일 뿐이다. 원래 일본 검도류를 익히던 사람들로서 옷만 조선옷으로 갈아입었지, 그 동작은 일본 검도에서 그다지 멀리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마디로 짜가 혹은 짝퉁 십팔기인 것이다. 모두들 십팔기를 흉내내고 있지만, 오히려 그 원형을 훼손, 변질시키고 있어 심히 걱정스럽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무예도보통지》 서문에는 "현륭원(顯隆園, 사도세자)의 뜻에 따라 십팔기(十八技)의 명칭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顯隆園志而十八技名始此〕"라고 명시하여, 고유명사로서 <십팔기>를 분명히 해놓고 있다. 그것이 정명(正名)이다. 이는 누가 함부로 바꿀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리하여 <십팔기(十八技)>는 왕명에 의해 공식적으로 이름지어진 조선의 국기(國技)가 된 것이다. 이후 십팔기는 서울을 지키는 5군영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조선군이 익혀야 하는 호국병장 무예였으며, 무과(武科)의 시험 과목이기도 하였다. 특히 지금의 장충단공원과 퇴계로 부근은 조선군의 핵심인 어영청(御營廳)의 군영지였다. 공원으로 꾸미기 이전의 장충단 터에는 ´십팔기 옛터(十八技舊地)´를 밝힌 표지석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국립극장 옆 산기슭으로 옮겨 놓은 석호정(石虎亭) 중수기에 그 사실이 명기되어 있다.

십팔기를 두고 흔히들 처음 6기로서 《무예제보》를 만들 때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참고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십팔기는 곧 중국 무술이라고 치부하는 이들도 있다. 한마디로 무예는 고사하고 문화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조차도 모르는 무지에서 나온 말이다. 그리고 나중에 추가한 12기 중 <권법>과 <왜검>을 제외한 나머지 기예는 모두 조선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독창적인 무예들이다. 여러 전란을 겪으면서 적국으로부터 받아들인 것도 있고, 또 멀리 신라의 화랑에 그 연기를 둔 <본국검(本國劍)>도 새로이 추가하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무예들이 어느 날 갑자기 이 땅에 그 무기들과 함께 창안된 것으로 볼 수만은 없다. 그것들은 당연히 고대로부터 전해져 오던 무예들이었다. 왕조가 아무리 바뀐다 해도 이 땅에 군대가 하루도 존재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지 않은가. 단지 그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것들을 과학적으로 체계화한 것일 뿐이다. 그 최종적인 작업이 바로 <십팔기(十八技)>이다. 법식(法式)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마구잡이식 기예는 결코 무예(武藝)라고 칭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선조에서부터 정조에 이르는 2백 여년 동안 끊임없이 연구 발전시킨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십팔기>이다. 임진왜란 이후 중국과 일본에서는 더 이상 발전시키지 못한 데 비해 조선은 지속적으로 무예에 관한 이론과 실기를 발전시켰던 것이다.

십팔기로 집약된 전통 무예는 정조 때에 이르러 가장 잘 완비되었으며, 그에 따른 군사 체제도 잘 갖추어져 더 이상 외침을 당하지 않고 나라를 굳건히 지킬 수가 있었다. 그러나 세계사의 흐름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서양 과학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조선은 점점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구한말 임오군란, 갑오경장 등의 소용돌이 속에 구식 군대의 상징인 무예 십팔기 역시 역사의 그늘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으며, 을사조약으로 조선군이 해체되면서 그 이름만 전설로 남게되었다.

<이 글은 인터넷 신문 데일리안에 연재중인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