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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의 일곱 가지 덕(七德)
  글쓴이 : 신성대     날짜 : 07-07-18 11:44     조회 : 6004    

신성대

전통무예연구가
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전통무예십팔기 보존회 회장
국군전통의장대 십팔기 사범
인터넷 신문 [데일리안 경기] 논설위원


서양에서 말하는 윤리학(倫理學, ethics)은 원래 ´습속´ ´성격´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ethos에서 유래하였으며, moral philosophy라고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좋은 에토스의 실현을, 사회적으로는 인간 관계를 규정하는 규범과 원리의 확립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을 말한다.

서양에서의 윤리 사상은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확립되었다. 소크라테스는 ´덕(德)´은 곧 ´지(知)´라고 하여, 명확한 이해와 자각으로 뒷받침된 덕이 아니면 덕의 이름에 값할 수 없다고 했다.

플라톤의 윤리 사상은 개인 윤리의 단계에 머물지 않고 사회 윤리로서의 국가학 혹은 정치학에 귀결한다. 그는 《국가》를 통해 인간의 영혼이 이성(理性)과 의지(意志)와 정욕(情欲)으로 나누어지듯이 국가를 구성하는 계급도 이성에 해당되는 지배 계급, 의지에 해당하는 방위 계급, 정욕에 해당하는 직능 계급으로 나누고, 이들 각자에 해당되는 덕이 지혜(智慧), 용기(勇氣), 절제(節制)라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이 세 가지 덕이 조화를 이루었을 때 정의(正義)가 실현된다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정한 의미에서 체계적인 덕(德) 이론을 세운 사람이었다. 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덕을 교육으로 습득할 수 있는 ´지성의 덕´과 습관으로 성립되는 ´습득적인 덕´의 두 종류로 나누었는데, 후자를 ´윤리적인 덕´이라 불렀다.

고대 로마의 스토아학파는 자연법을 존중하고, 인간이 의지로 자연법칙과 도덕 법칙을 합치시키는 삶의 방식을 이상으로 했다. 키케로는 저서 《의무에 관하여》에서 "정의의 근저는 말과 약속에 대한 충실성, 거짓 없음, 곧 진실성이다"라고 하였다.

중세 윤리학은 그리스도교의 윤리신학이 그 전형이 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적 덕론을 기초로 그리스도교적 덕론을 체계화하였는데, 정의(正義), 절제(節制) 등 이전의 것들은 인간적 윤리덕(倫理德)이라 하고, 신(神)에 대한 덕(德)으로서 믿음, 소망, 사랑을 들었다.

위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서양의 일곱 가지 덕(德, virture)이 정립되었다. 그 중 네 가지는 자연의 덕이라 하여 고대 철학자들이 정한 신중(愼重), 절제(節制), 용기(勇氣), 정의(正義)의 기본 덕을 말하고, 여기에 신학적인 덕인 믿음, 소망, 사랑의 세 가지를 합쳐 일곱 가지 덕〔七德〕을 그리스도교 윤리의 기본으로 꼽았다. 그리고 이 중에서 사랑을 가장 으뜸한 덕으로 중요시하였다.

일반적으로 덕(德)이란 생활과 행동을 윤리(倫理)의 원칙에 일치시키는 것이라고 정의되어 왔으므로 이 일곱 가지 덕은 이러한 윤리의 원칙을 따를 때 취하는 태도와 성향을 뜻한다. 그 외에도 박애(博愛), 관용(寬容), 책임(責任), 봉사(奉仕) 등의 여러 덕목이 파생되어 나왔다.

동양과 서양에서의 덕(德)에 대한 관념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서양에서는 인간을 이성(理性)과 의지(意志)를 갖춘 개인적 주체로서의 인격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데 비해, 동양에서는 인간 관계에서 이상적인 상태를 추구하는 개념을 주요 덕목으로 꼽았다. 유가오덕(儒家五德) 중 지(智)를 제외한 인(仁), 의(義), 예(禮), 신(信)은 모두 대인 관계에서 비롯된 사회적인 덕목들이다.

반면에 서양의 네 가지 ´자연의 덕´인 신중, 절제, 용기, 정의는 동양의 병가오덕(兵家五德: 智, 信, 仁, 嚴, 勇)과 오히려 흡사해 무덕(武德), 즉 무인(武人)이 갖춰야 할 덕목 그대로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네 가지 덕이 중세에는 기사도(騎士道) 정신으로 이어지며 오늘날의 신사도(紳士道) 정신, 즉 유럽 정신의 뿌리가 된 것이다. 고대 그리스는 분명 무(武)의 나라였다. 비록 문(文)의 성향이 강한 위대한 철학자들에 의해 정립되었지만, 무(武)의 정신으로 계승되어 진취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덕목으로서 서양 문화를 선도하고 있는 것이다.

버지니아 조승희 총기사건은 큰 충격과 함께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중에서도 덕(德)의 면에서 미국과 한국, 아니 동양과 서양의 차이점을 극명하게 드러나게 해준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건의 발생 원인과 과정, 그리고 그 뒷마무리까지, 모든 것이 우리의 정서와는 확연히 다르다.

불과 얼마 전 우리는 미군 장갑차에 의해 사고사한 여중생을 제2의 유관순으로 만들어 거국적인 반미운동으로 승화(?)시킨 전력이 있어, 당장 이번 사건으로 한국인들이 당할 보복을 걱정하며 가슴을 콩당거렸었다. 하지만 결과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조용히 마무리 짓고 넘어가고 말았으며, 오히려 그런 우리를 부끄럽게 하였다. 사건은 사건일 뿐, 그게 시작이자 끝이었다.

왜 이렇게 다를까? 성숙된 민주주의와 덜 성숙된 민주주의 차이인가? 큰 나라와 작은 나라의 다른 점인가? 둘 다 아니다. 그건 분명 덕(德)의 차이에서 온 것이다. 우리의 민족성, 우리 문화에서 부지불식간에 사라져버린 절제의 덕(德)을 이번 사건을 통해 확인한 거다. 예(禮)가 사라지고, 엄(嚴)이 사라지고, 인(仁)이 사라진 마당에서 절제가 자랄 수가 없었다. 오직 정(情)과 한(恨)의 적나라한 동물적 감정이 이런 문화적 차이를 만들어낸 것이다.

문화란 본질적으로 형식이다. 다듬어지지 못한 인간의 행태를 문화라 하지 않는다.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당사자의 심정을 누가 알겠는가. 위로하고 다독거려서 하루빨리 상처를 아물게 해서 함께하는 삶에 동참하도록 도우는 것이 우리가 할 일(禮)이다. 아픈 상처를 더욱 헤집고 부추겨서 어떤 목적으로 이용하는 잔혹하고 야비한 짓은 이제 그만하자. 절제의 미덕 없이는 한(恨)은 한(恨)으로 남을 뿐이다. 우리에게는 한풀이(살풀이) 문화가 있다. 그 본디 뜻을 잘 헤아려 보라.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문화적 차이가 문화적 수준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이 글은 인터넷 신문 데일리안에 연재중인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