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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名)에 목숨을 걸어라
  글쓴이 : 신성대     날짜 : 07-07-18 11:43     조회 : 5135    

신성대

전통무예연구가
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전통무예십팔기 보존회 회장
국군전통의장대 십팔기 사범
인터넷 신문 [데일리안 경기] 논설위원


세상에 나아가 뜻을 펴고, 출세하고자 하는 자는 모두 공명(功名)을 추구한다. 무인(武人) 문인(文人) 할 것 없이 누구나가 세상에 나아가 양명(揚名)코자 하였다. 강호의 수많은 무예인들이 그것을 위해 목숨을 걸었고, 중세 유럽에서는 기사(騎士)가 되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으며, 명예를 그 목숨보다 중시하였다. 그만큼 예로부터 무예인들은 명(名)을 소중히 생각했다.

당연히 그 이름에는 항상 그에 걸맞은 책임, 때로는 의무가 수반되었다. 개인적인 것만이 아니고 문파(문중) 혹은 가문의 명예까지를 항상 생각하여야 했다. 서구 소설이나 영화에서 자주 “내 이름을 걸고” 혹은 “내 아버지(어머니)의 이름을 걸고”라는 장면이 나온다. 이쯤이면 대개 상대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일은 거기에서 끝이다. 한발 더 나아가 “가문의 이름으로”까지 나오면 목숨까지 걸겠다는 것이다. 또 “신의 이름으로”라고 한다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것이다.

옛말에 “집안을 어떻게 다스려 나가고, 그 자식에게 어떤 이름을 지어 주는가를 보면 그의 선비됨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간혹 우리는 사람마다 그답지 못한 일을 하거나, 그에 걸맞은 대접을 받지 못했을 때 “명색이 OO인데”라고 말한다. 그리고 심할 경우에는 “이름값도 못한다” “자리값도 못한다”고 나무라기도 한다.

실제에서도 그렇지만 무협 소설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들은 각기 별호를 지니고 있다. 대개 강호인들이 그 사람의 품성과 업적에 따라 붙여준 것들이다. 좋든 나쁘든 그 별호는 그를 따라다니게 되는데, 심지어 녹림의 무리라 해도 그 별호에 걸맞게 행동하게 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 이름에 목숨을 걸기도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무법자 · 무뢰한 · 암흑가조차도 명예에 관한 그들만의 법을 가지고 있었으며, 승부 규칙의 명확함 등 보편적인 기본 도덕은 지켰었다. 이렇듯 예나 지금이나 명(名)은 귀한 것이고, 또 그 앞에 붙어 빛내줄 별호 하나 얻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이름(名)을 중히 여기는 것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았다. 지금은 각종 업적에 대해 수여하는 명예 작위가 되었지만, 그 중세의 기사(騎士)들이 갖추어야 할 소양으로 용맹함과 명예심, 그리고 예의바름을 꼽는다. 근대 서양의 귀족들도 자신의 이름이나 가문의 명예에 손상을 입었을 때 그 자리에서 결투를 신청하는 장면을 영화나 소설 속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가 있다. 이 기사도(騎士道)가 오늘날 유럽 신사도(紳士道)의 모태가 된다.

그런데 현대 자본주의 시대에 이르러 명(名)이 자본과 결탁하면서 이름은 곧 돈이 되는 공식이 만들어졌다. 이름난 기업 혹은 유명 상표가 옛 명문가를 대신하고, 옛 성현이나 역사적인 인물의 초상이 걸려 있어야 할 명예의 전당에 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이름들은 주식 시세와 똑같이 시시각각 돈으로 환산되고 있다. 위대한 옛 인물들의 이름들로 포장된 온갖 상품들이 진열대에서 창녀의 미소를 띤 채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개인들도 자신의 이름을 팔기 위해 언제든지 벌거벗을 준비를 하고 있다.

요즈음 사람들은 이 명(名)을 너무 가벼이 여기는 것 같다. 지금은 호(號)보다는 대개 그 직책이나 자격 등을 많이 사용한다. 장관 · 의원 · 회장 · 판사 · 의사 · 검사 · 변호사 · 교수 · 박사 · 교사 등, 대개 명품으로 불려지는 것들을 세인들은 선망한다. 하지만 이들 중에는 너무 쉽게 그것을 얻어서인지, 아니면 그것을 다른 목적(대개 돈)을 위한 도구 정도로 생각해서인지, 그 이름 때문에 망신당하는(실제로는 이름을 더럽힌) 꼴을 자주 본다. 명(名)을 이(利)와 바꾸는 어리석은 사람이 너무 많다는 말이다.

명(名)은 대개 공(功)을 쌓아서 얻어진다. 그리고 그 공(功)은 용(勇) · 인(仁) · 예(禮) · 신(信) · 성(誠) · 의(義) · 절(節) 등의 반려를 받아서 이룬다. 덕(德)의 반려를 받지 못한 명(名)은 공명(空名)이나 허명(虛名)에 불과하며, 때로는 악명(惡名)이 되고 만다. 넘어진 공(功)은 다시 세울 수 있고, 축난 이(利)도 다시 채울 수 있다. 벗어던진 예(禮) 역시 다시 갖출 수 있고, 다하지 못한 충(忠)을 다시 바칠 수도 있다. 모자란 지(智)는 다시 얻을 수 있고, 떨어진 의(義)도 다시 내걸 수 있다. 하지만 한번 더럽혀진 명(名)은 결코 제 빛깔을 찾을 수가 없다.

수년 전 X파일 사건이 터지면서 재벌로부터 떡값을 받았으리라는 의혹을 받은 정치인, 그리고 검사들과 여러 잘난 사람들의 이름이 흘러나온다. 아하, 그러니까 이 나라 제일의 재벌로부터 떡값(장학금)을 받지 못한 나머지 인사들은 한마디로 우리 사회에서 별볼일 없거나 이삼류 인생밖에 안 된다는 말이지. 무슨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이름깨나 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비록 옛날 무인들처럼 목숨을 걸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 이름을 얻기 위해 평생을 바쳐왔는데, 그까짓 돈 몇 푼(서민들에겐 엄청난 액수이지만, 그만한 그들에게는 없어도 그만인), 혹은 정(情)이나 연(緣)과 맞바꾸다니. 그 명성과 그 자리가 그토록 하찮은 것이었나? 떡값에 이름을 파는 것은 바보짓이다. 그걸 은혜로 아는가? 명(名)은 결코 다른 무엇과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상대의 알량한 떡값에 자신의 모든 것(名)을 걸다니! 그런 어리석은 계산법(거래)이 어디 있나? 물론 살다보면 단 한번, 목숨을 바쳐서라도 신의(信義)를 지켜야 할 경우가 있다. 이때에는 기꺼이 이름을 바칠 수 있을 것이다. 떡값 없이도 말이다.

명(名)은 얻기도 힘들지만 지키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진정 자기를 다스리는 지혜만이 명(名)을 온전히 보전해 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엄(嚴)’이다. 더욱이 딱한 일은, 근래에 와서 악명(惡名)과 오명(汚名)도 이름이랍시고 부끄러운 줄 모르고 버젓이 달고 다니는 몰염치한 인간들이 부쩍 늘어나서 같은 하늘 아래 함께 숨쉬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낯가죽이 방패보다도 더 두꺼운 모양이다. ‘치(恥)’라는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은 별난 종자들이다.

그들을 나무라야 한다. 그래서 고개를 못 들게 해야 한다. 왜 그런 역겨운 인간들을 매일같이 보고 살도록 내버려둔단 말인가? 우리 아이들에게 그 꼴을 보여줄 수 없지 않은가. 그들에게 손가락질을 해야 한다. 그들에게 염치(廉恥)의 돌을 던져야 한다. 그것은 시민의 의무이자 당연한 권리이다. 그들이 잘 먹고 잘 사는 만큼 더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한(恨)이 깊어지기 때문이다. 사회란 논밭과 같은 곳이다. 그냥 두면 잡초가 더 잘 자라는 법이다. 농사가 잘되기를 바랄 수 없지 않은가.

여담이지만, 요즈음 인터넷을 통해 몸도 숨기고 이름도 숨겨서 남의 집 담장 너머로 돌멩이 던지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저 심심하니까 아무데고 남들이 던지면 저도 따라 던진다. 옳고 그르고를 떠나 익명(匿名)이란 원래 소인배들이나 하는 부끄러운 짓이다. 그곳에는 용(勇)도, 의(義)도, 예(禮)도 없다. 무인(武人)이 할 짓이 아니다. 옛말에 “개 한 마리가 형체를 보고 짖으면 모든 개가 이 소리를 듣고 따라 짖는데, 세상에서 이를 병으로 여긴 지가 참으로 오래되었다”고 했다.


<이 글은 인터넷 신문 데일리안에 연재중인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