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십팔기협회 :::


   
  폭력과 잔인성
  글쓴이 : 신성대     날짜 : 07-07-18 11:41     조회 : 4788    

신성대

전통무예연구가
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전통무예십팔기 보존회 회장
국군전통의장대 십팔기 사범
인터넷 신문 [데일리안 경기] 논설위원


옛말에 “어리석은 자는 행동에 틈이 생길수록 고집을 부리고, 비루한 자는 거짓을 꾸밀수록 더욱 야만스러워진다”고 하였다. 인간의 본성에는 항상 잔인성이 내재되어 있다. 먼 원시시대, 혹은 더 멀리 인간의 모습을 갖추기 전 동물이었을 적부터 습득된 잔인한 야성이 DNA에 각인되어 있는 모양이다.

다행히 문명화되면서 온갖 법률과 도덕규범, 자기 수양, 교육 등을 통해 이 위험한 본성을 잘 다스려 왔다. 그렇지만 때로는 이 통제를 벗어나 살인이며 살생·폭력·전쟁을 부르기도 한다. 또한 무력적인 잔인성 말고도 문화적 수단을 이용하여 그것을 드러낼 때도 많다. 말이나 글로 얼마든지 상대를 괴롭히기도 하고, 아이나 동물들을 학대하는 등의 여러 가지 변형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가장 현대적인 방법은 바로 인터넷이다.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글이나 말로 누구를 공격하거나 비판할 때에는 언론매체나 방송을 통한 공개적인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통제 기능이 작동하여 많이 걸러지고 순화되어 살기와 비린내가 거의 제거될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의 인터넷에서는 전혀 상황이 다르다. 댓글은 즉석 인민재판이다. 이곳은 마치 굶주려 먹잇감을 기다리고 있는 악어나 사자 우리 같은 곳이다. 고기가 떨어지면 순식간에 몰려들어 먹어치우고, 또 다음 먹잇감을 기다린다.

배고픈, 아니 배부른 천민들의 반항·해방·저항·폭력이 끊이지 않는다. 프랑스의 작가 파스칼 브뤼크네르는 말한다. “헐뜯기 문화가 판을 친다. 광고에 의한 광고 비판, 미디어에 의한 미디어 비판, 공연에 의한 공연 비판 등등,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자기편에 대한 트집잡기는 이제 특별히 벌이가 좋은 수단이 되어 버렸다.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모든 상품은 모두 사용법과 나란히 자기비판을 포함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더없이 적나라한 선동 문화가 공식적인 문화가 될 만큼 전복(顚覆)의 아카데미즘이 확산되어 간다. 소외 집단, 패륜아, 괴짜, 유행에 민감한 자들이 이득이 훌륭한 원천으로 간주됨으로써 적어도 말로나마 그 위상이 높아지게 된 것이다.”

한민족의 혈관에는 북방 기마 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어 거칠고 호전적이며 야성적인 민족성이 내재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성질이 일제 식민시대, 그리고 독재적인 군사 정권의 지배를 거치는 동안 꾹꾹 억눌려 왔다. 드디어 문민정부가 3대를 이어왔지만 어느 누구도, 어떤 정권도 이 억눌리고 꽉 막힌 가슴을 도무지 시원하게 뚫어 주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점점 매운 음식을 찾게 되고, 모두들 주머니에 돌멩이 몇 개씩을 넣고 다닌다. 그러다가 정치인이든 연예인이든 경제인이든 일반 개인이든 가릴 것 없이 누군가가 공공의 적으로 찍히게 되면 모두들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돌멩이를 던져댄다.
누구든 까딱 잘못하면 다음 희생자가 되고 만다. 억압된 불만을 잔인하게 발산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도 순간적이다. 애초부터 희생자가 자신에게 직접 스트레스를 준 당사자가 아닌, 어디까지나 대용품이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해소될 리가 없다. 결과적으로 무자비하고 무책임한 잔인성만 키우게 된다. 동굴 속 웅녀의 답답함, 혹은 수천 년을 웅크리고 살아온 반도의 답답함을 누가 풀어 주겠는가?

올림픽과 월드컵 등 큰 국제 행사를 치르면서 깨끗이 사용하자는 캠페인을 벌인 덕분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공중 화장실 벽들에 낙서가 사라진 것은 사실 인터넷 보급 때문이다. 더 이상 그런 싱거운 짓일랑은 이제 하지 않는다. 남녀노소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변태나 정신이상자들까지 누구든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불특정 개인·단체·다수에게 집적 화살을 날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반응과 결과를 즉석에서 확인할 수 있다. 파장이 커지면 쾌감도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진다. 그걸 즐기는 것이다.

제우스 신 앞에서 행해지던 고대 그리스의 절제된 올림픽 경기와 달리, 고대 로마 시민들은 원형 경기장에 노예들을 몰아넣고서 서로를 죽이게 하여 그 욕구불만을 해소할 수 있었다. 오락으로 즐겼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터이다. 월남전 이후 전쟁다운 전쟁을 겪지 못해 피 냄새를 맡지 못한 인간들은 한동안 스포츠라는 대용품에 만족하여야 했다. 그 사이 중동 전쟁, 구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 지역적 분쟁이 있기는 하였지만 전 세계인이 동시적으로 즐길 수 있는 것은 못되었다. 피의 갈증을 해소하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그러다가 9·11 테러가 발생한 것이다. 미처 영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그야말로 환상적인 광경을 전 세계인이 동시에 즐기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세계사에 길이 남을 실수(?)를 하고 만다.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그리고 테러범을 소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여 전쟁(?)을 치렀다. 바야흐로 테러를 전쟁의 영역에 포함시켜 버린 것이다. 이제 테러는 당당한 전쟁 수단이 되어 버렸다. 테러는 원래 범죄의 영역이었다. 범죄와 전쟁은 엄연히 다르다. 악(惡)을 물리친다고 하였지만, 전쟁에 무슨 선악(善惡)의 경계가 있는가. 드디어 테러가 선악의 굴레에서 벗어나 전쟁의 수단으로서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선전 포고 없이, 그리고 민간인 복장으로 군인이 아닌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전투할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전쟁 개념과 공식이 생겨난 것이다. 전쟁의 고전적 규칙이 무너진 것이다. 무역센터가 아니라 도시 전체를 날렸다 해도 끝까지 테러는 범죄로서 대접하였어야 했다. ‘전쟁’이 아니라 ‘소탕’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어야 했다. 빈 라덴과 부시는 테러와 전쟁의 경제를 허문 역사적인 인물로 길이 남을 것이다. 또한 인간들은 고지식하게 케케묵은 룰을 지키는 전쟁보다 룰이 없는 예상 불가능한, 상상을 초월하는, 9·11 테러보다 훨씬 멋진(?) 테러(전쟁)를 즐길 준비를 하고서 은근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자, 다음은 어디일까?

나라와 나라 사이, 개인과 개인 사이가 점점 좁혀지면서 인간들의 스트레스 지수도 점점 올라가는 것 같다. 스포츠 경기 역시 점점 격렬함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단순한 승부, 기록의 갱신은 이미 고전적인 레퍼토리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전쟁의 참혹함이 심할수록 운동 경기에 절제된 규칙을 적용하는 데 반해, 평화가 오래 계속될수록 스포츠는 오히려 더 격렬한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일상의 밋밋함을 참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 그러한 모양이다.

브뤼크네르는 다시 말한다. “우리의 민주 사회들은 평등주의를 지향하기 때문에 시샘하고, 타인에게 부여된 조그만 특권(찬스) 앞에서도 분노를 조장한다. 따라서 우리의 사정이 좋지 못할 때 다른 사람의 행복을 보는 것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없다. 재산·건강 그리고 사랑을 매우 많이 물려받은 사람들이 으스대며 걷는 광경, 그들이 점잔 빼며 폼잡는 과시적인 태도, 이것들이 모두 가증스러운 것이다.

이 때문에 텔레비전 뉴스에서 세계의 끔찍한 사건들을 일상적으로 바라보는 일이 마음을 가라앉히는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불행을 특별히 즐기기 때문이 아니라, 이 불행이 우리가 생각보다 혼자가 아니고 심지어 운이 좋다고까지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교를 통해 위안을 얻는다”라고.

요즈음 격투기가 인기를 더해 가고 있다. 처음에는 그 정도가 지나친데다 다소 천박하게 여겨져 국내에서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였는데, 한 씨름 선수가 뛰어들어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하필 그 선수가 제압한 상대가 미국 선수인 바람에 인기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갑작스레 높아졌다. 최소한의 규칙으로 마음껏 화끈하게 경기를 펼쳐 관중들의 스트레스를 풀어 준다. 말이 경기지 사실은 막싸움이다. 선수는 화끈하게 돈을 벌고, 관중은 화끈하게 잔인성을 발산한다. 흡사 70년대 유행했던 개싸움을 연상케 한다. 인간이 얼마나 개 같을 수 있는가를 시험하는 것 같다.

여기에 무슨 덕목이 있는가. 악마적인 잔인성만이 돈의 크기를 결정한다. 이미 용도 폐기된 수많은 고전 무예가 호신술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스포츠화 되어 가고 있다. 본연의 무예 정신인 무덕(武德)은 사라지고, 오직 몇 가지 잔기술만이 돈벌이용 스포츠로 남아 있다. 격투기는 결코 스포츠가 아니다. 그냥 격투기일 뿐이다. 서양에서는 전통적으로 서로 결투할 경우에 주먹만을 사용하였다. 발로 상대를 가격하는 것을 비신사적인 행위로 여겼다. 그것을 스포츠라 한다면 머지않아 올림픽에서 개싸움이나 진짜 로마식 검투 경기를 보게 될 것이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하지만, 어느 사이에 운동 경기가 인간의 야성을 억제하고 순화시키는 본연의 기능을 상실하고, 도리어 야성을 분출시켜 더욱 잔인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 테러든 격투기든 모두 전쟁의 부재가 낳은 또 다른 폭력이란 말인가? 옛말에 “무릇 작은 즐거움이 의(義)를 해치고, 작은 지혜가 도(道)를 해치며, 낮은 판단이 치(治)를 그르치고, 구차스런 마음은 덕(德)을 해친다”고 하였다.

<이 글은 인터넷 신문 데일리안에 연재중인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