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십팔기협회 :::


   
  용(勇)은 계산에 앞선다(2)
  글쓴이 : 신성대     날짜 : 07-07-17 23:58     조회 : 5523    

신성대

전통무예연구가
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전통무예십팔기 보존회 회장
국군전통의장대 십팔기 사범
인터넷 신문 [데일리안 경기] 논설위원

중국의 루쉰〔魯迅〕은 “온순하고 선량하다는 것은 악덕(惡德)은 아니지만, 발전해야 하는데도 모든 일에 대해 순응하고 선량하기만 하다면 미덕(美德)이 아니라 발전성이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용(勇)은 실천하는 힘이다. 이것이 부족하면 그 어떤 덕목도 제구실을 못한다. 용(勇)이 없는 인(仁)은 퍼지지 못하고, 충(忠)은 마음뿐이다. 의(義)는 일어서지 못하고, 엄(嚴)은 지켜지지 않는다. 절(節)은 흐느적거리고, 지(智)는 비겁을 낳는다. 신(信)은 헛되며, 공(功)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반대로 덕(德)이 없는 용(勇)은 만용(蠻勇)이 된다. 길들여지지 않은, 다듬어지지 않은, 어리석은, 몰염치한, 욕심에 찬 용(勇)이다. 지(智) · 인(仁) · 절(節) · 의(義)의 반려를 받지 못한 용(勇)은 비참한 결과를 부른다.

12·12 군부 반란은 의(義)를 저버린 용(勇)이며, 5·18 시민 학살은 인(仁)이 없는 용(勇)의 대표적인 예이다. 그저 임전무퇴와 명령복종만이 참다운 군인 정신이라고 가르친 대한민국 국군의 현주소이다.

개혁한답시고 부지깽이로 아궁이 마구 쑤셔대다가 잘 타던 불 꺼트리는 참여 정권은 지(智)가 부족한 용(勇)의 한 예가 될 수 있겠다. 부지깽이는 지혜의 지팡이이다. 꼭 요긴할 때만 슬쩍슬쩍 사용해야 한다. 초보자들은 함부로 쑤셔대다가 불 꺼트리고 부지깽이까지 다 태우고 만다. 5공 시절 소 잡아먹고 사냥개들 데리고 농사짓겠다고 한 것도 마찬가지다. 호미 대신 낫으로 김매는 꼴이다.

옛말에 “지혜 있는 자는 잘못을 두 번 저지르지 않고, 용기 있는 자는 죽음을 피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용(勇)이라 해서 억세고 과감하게 무력을 뽐내는 것으로만 생각해서도 곤란하다. 천성적으로 용(勇)과 기(氣)가 센 사람은 예(禮)와 지(智) 혹은 인(仁)을 등한시하기 쉬워 일을 그르치고, 작은 치욕을 부끄럽게 여겨 큰 원한을 사기도 하여 남과 자신을 망친 고사가 수없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호기(豪氣)와 격정(激情)을 누르고 양보와 관용, 신중과 절제를 함께 익혀야 한다. 그것이 수양인의 자세다.

무언(武諺)에 이르기를 “무예가 높아지면 담이 커지고, 담이 커지면 무예가 더욱 높아진다”고 하였다. 용(勇)은 정통적으로 무(武)를 통해 신체를 단련시키면서 길러왔다. 좋은 말이나 글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용(勇)은 땀을 먹고 자란다. 오늘날에는 여러 가지 격렬한 스포츠를 통해 용(勇)을 기른다. 도전 · 탐험 · 정복 등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스포츠나 경기를 통해 체력과 인내력의 한계를 늘려가고 있다.

우리나라 기업에서는 대학 교육에 대해 불만이 많다. 제대로 된 인재를 키워내지 못하고, 불량품을 양산한다는 것이다. 대학을 믿고, 성적을 믿고 뽑았는데 영 신통치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가려내고 재교육하는 데 막대한 비용이 들어간다고 불만이다. 전공 지식은 성적으로 뽑았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도전 정신, 패기, 솔선수범, 인내력, 예의, 적응력 등등 기본적인 소양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문약(文弱)한, 무(武)적 성향이 부족한 인재(?)들뿐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원 교육에 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바로 ‘극기 훈련’이라는 것이다. 부족한 인내력과 용기를 길러 보자는 발상에서 나온 것 같은데, 군대까지 갔다 온 대한 남아를 다시 해병대 훈련을 시키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군(軍)도 이제 예전 같지가 않은 걸 어떡하나.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해병대 출신을 뽑았으면 좋았을 것을. 잘하면 해병대나 공수부대 서로 먼저 입대하려고 일류대학교 학생들 줄서겠다. 그렇다고 그것 며칠 훈련시킨다 해서 갑자기 뭐가 생길 것 같은가? 물론 당장은 그런 기분이 든다. 그렇지만 뭉친 근육이 풀어질 때쯤이면 언제 그랬던가 싶게 잊어버리고 만다. 짐작컨대 들인 비용과 시간만큼 효과를 얻기 힘들 것이다.

용(勇)은 일찍부터, 가능하면 보다 어렸을 적부터 꾸준히 길러야 한다. 어느 날 갑자기 인내심 강하고 용감한 사람이 되는 법은 없다. 물론 극기 훈련의 목적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닐 터이다. 아마도 회사일이 힘들더라도 참고 열심히 해서 이익을 많이 올리자는 것일 게다. 아무렴 용(勇)과 인(忍)을 구별하지 못하기야 할까.

우리의 학교 교육이 그 추구하는 본연의 목적에 충실했더라면 이런 희한한 풍경이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말로는 지육(智育) · 덕육(德育) · 체육(體育)을 외치면서도 오직 지(知)만을 가르쳐 온 결과가 아니겠는가. 그것도 올바른 지(知)가 아닌, 오직 대학 문고리 잡는 데에만 소용될 뿐인 그런 것을. 체육을 그저 신체 발육의 보조 수단 정도로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제까지는 무지에서 생긴 일이라 치자. 더 이상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 고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어떤 이유에서라도 그것은 우선 일선 교육자 모두의 잘못이다.

누가 뭐래도, 설령 쫓겨난다 해도 제대로 가르쳤어야 했다.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면, 잘못을 바로잡을 용기가 없다면 그 자리를 물러나야 한다. 그건 ‘학문(學問)’하는 자세가 아니다. 가르치는 사람조차도 알지 못하는 용(勇)을 어디에서 배운단 말인가?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그저 둥글둥글 사는 것이 세상 살아가는 지혜라고 가르치지는 않는지 적이 염려스럽다. 어렵고 혼란스럽던 시절도 이젠 한참 지났다. 스스로 당당해져야 한다. 그것이 용(勇)이다. 그래서 “양심이 밝은 사람은 잘못이 있으면 스스로 안다. 알면서 고치지 않는 것을 두고 자신을 속인다고 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가난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니, 정작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가난하면서 의지를 잃는 것이다. 가난하고 지위 없음을 싫어할 것이 아니니, 싫어해야 할 것은 비천하면서 무능한 것이다. 늙음은 한탄할 것이 아니고, 오래 살면서 삶을 허비하는 것을 한탄해야 한다. 죽음을 슬퍼할 일이 아니니, 정말 슬퍼해야 할 것은 죽을 때까지도 남에게 도움이 안 되는 것이다.”고 했다.

용(勇)이 없는 삶은 비루한 삶이다. 가뜩이나 학교 교육이 덕(德)으로서의 용을 길러주지 못하고 오직 이기심만 부추기고 있는 마당에, 그나마 대한 남아를 진정한 장부로 키워주던 군복무 기간마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야금야금 줄이고 있으니, 나약한 주인들이 짊어져야 할 이 땅의 미래가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은 인터넷 신문 데일리안에 연재중인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