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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비 문화를 다시 생각한다
  글쓴이 : 신성대     날짜 : 07-07-17 23:52     조회 : 5304    

신성대

전통무예연구가
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전통무예십팔기 보존회 회장
국군전통의장대 십팔기 사범
인터넷 신문 [데일리안 경기] 논설위원


조선시대에 들어와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을 쓰는 한편 무(武)도 함께 억눌렀다. 그리하여 역사상 그 어느 왕조보다도 문(文)의 문화가 꽃을 피우게 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힘은 화랑, 즉 문무겸전의 정신에서 나왔다. 이를 바탕으로 통일신라 시기에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찬란한 번영을 구가하게 된다. 고려시대에는 사회 체제의 발달과 함께 전문 관료들인 문신(文臣)과 무신(武臣)이 차츰 구분되기 시작하면서 무신을 무시하게 된다. 무신 정권의 도발은 이러한 문무(文武)의 차별과 갈등을 극명하게 드러낸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양반 제도의 도입으로 처음부터 문신과 무신의 구분을 확실히 해서 선발 방식부터 달랐다. 그리하여 문사로 대변되는 선비 문화라는 독특한 문화 형태를 만들어 냈다. 비록 공자가 육예(六藝)를 강조했다지만 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 동방예의지국의 선비들은 한결같이 공자 말씀만 잘 외워 과거시험만 붙으면 벼슬길로 나아갈 수가 있었다. 오직 글로서, 즉 입으로 세상을 다스리고자 했다. 모든 선비가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인물상은 제갈공명이었다. 하지만 세계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든 선비들에 의한 피비린내 나는 난세(亂世)를 맞이하는 데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개국 이래 공신과 양반 계층은 세습되어 수적으로 점점 늘어나고, 벼슬자리는 한정되다 보니 점점 경쟁이 치열해진다. 한번 양반은 영원한 양반, 결코 다른 길은 있을 수 없었다. 벼슬이 아니면 차라리 굶어 죽겠다고 버텨 보지만 그게 쉬운 일인가. 이제 상대를 끄집어 내리지 않으면 더 이상 자리가 생기지 않는다. 벼슬을 못하면 자신은 물론 그 가문이 몰락할 수밖에 없다. 이 사생결단의 구직난을 좀 덜기 위해 조선 중기부터는 서얼 차별을 두어 경쟁률을 낮춰 보지만 그것도 잠시, 결국 피비린내 나는 당파 싸움을 불러오게 된다. 오직 입으로만 싸워야 하는 이 처절한 싸움은 결코 끝나는 법이 없다.

칼싸움은 승부가 분명하고 빠른 데 비해, 말싸움은 승패가 불분명하고 지루할 수밖에 없다. 비록 1심에서는 졌지만 2심, 3심에서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다. 어디 3심뿐이던가, 4심, 5심, 자자손손 싸울 수 있다. 오죽하면 외적에게 나라를 다 빼앗기고 도망다니면서도 물고뜯는 싸움을 계속하여야 했다. 이미 조선의 건국과 함께 구축된 제도 속에 태생적으로 잉태된 숙명적인 결과들이다. 문(文)의 문화, 즉 선비 문화의 본질적 특성이 가장 추악하게 드러난 결과이기도 하다.

황우석 줄기세포 논문 조작 사건은 전통적인 선비 문화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하다. 유리할 때에는 수십 명이 몰려들어 이름 석 자 걸치기에 혈안이더니, 판이 깨어지자 저마다 도망가기에 바쁘다. 영락없는 야바위판이다. 전 국민을 실망시키고, 한국을 세계적인 웃음거리로 만들어 놓고도 누구 하나 책임지고 뛰어내리는 시늉조차 하는 사람이 없다. 발뺌하고 책임을 떠넘기기에 지칠 줄도 모른다. 너무 머리들이 좋아서 지켜보는 국민 모두가 헷갈린다. 엎치락뒤치락하는 꼴이 흡사 진흙탕 개싸움을 보는 것 같다. 아마도 유전자 조작으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는 모양이다. 스너피라는 개의 복제는 분명하다고 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수의학과에서 연구를 계속하는 것이 옳았을 듯하다. 성급히 산부인과까지 넘어와 욕심내는 바람에 개망신당하고 만 것 같다.

옛말에 “대체로 총명한 사람이 끝에 가서 일을 그르치곤 한다. 왜 그럴까? 총명한 사람은 남보다 쉽게 자기 의견을 만들지만, 의견이 생기자마자 참지 못하고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욕(愛慾)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사람들은 언제나 남달리 총명한 이들이다”라고 하였다.

무인(武人)은 체질적으로 행동이 앞선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목숨으로 책임진다. 변명은 무인의 수치이고, 또 그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에 비해 문인(文人)은 습관적으로 계산이 앞선다. 입으로 산다. 말만 잘하면 설령 죽을죄를 지었어도 빠져나갈 수 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어떤 상황에서든 꾀를 내면 살 수 있다. 잘되면 제 탓이요, 못되면 누구 탓으로 돌리는 것은 이미 몸에 밴 습관이다. 그들에게 그건 능력이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이기고 지고는 세 치 혀에 달렸다. 그리고 끝까지 우겨야 이긴다. 지고도 졌다고 해선 안 된다. 상대의 약점을 찾아내어 다시 물고 늘어지면 언제든지 역전시킬 수 있다.

칼로써 지면 남는 것이 없는데, 말로 지면 앙금이 남는다. 칼로 싸우면 승자만 남지만, 입으로 싸우면 아무도 죽지 않는다. 그러니까 예나 지금이나 말싸움엔 승패가 없다는 말이다. 자존심만 상할 뿐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 명색이 선비인데 고집으로 버텨서 자존심이라도 지켜야 한다. 그것이 곧 선비의 절개다. 지고도 졌다 하지 않으니 이긴 놈도 기분이 나쁘다. 결국 감정싸움이 되고, 한(恨)을 남긴다. 아마 이런 점 때문에 공자님께서도 선비는 입을 조심해야 한다고 그토록 누누이 말씀하셨던가 보다. 또 혼자서 안 되면 떼를 짓는다. 그렇지만 덕(德)을 따른 것이 아니라 정(情)이나 사상, 또는 이(利)에 따라 모였기 때문에 상황이 바뀌어 불리(不利)해지면 금방 쪼개진다.

정(情)은 상하기 쉽고, 생각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는 적보다 더한 원수지간이 되고, 배신이 난무하게 된다.
또한 사랑방 방석절개는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타성을 기른다. 따라서 진취성이 떨어지고, 발전적이지 못하다. 그저 현실 안주에 만족하려는 속성이 강하다. 조선 중종 때의 정치가로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주창하며 개혁을 주도하다 훈구파의 탄핵으로 죽임을 당한 조광조(趙光祖)나 구한말 김옥균(金玉均)처럼 간혹 개혁적인 인물도 나오지만, 결코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비록 문신이지만 무(武)의 성향을 가진 자는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 말기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고 무인들은 의병으로 싸우다 죽는 데 비해, 선비는 이도저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절개를 증명해 보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자결뿐이다. 산이나 들판에서 적과 싸우다 죽는 무인들은 이름조차 못 남기지만, 목욕재계하고 자리 깔고 자결한 선비는 ‘충절’이란 가문의 영광을 후손에게 유산으로 남길 수 있는 것이다. 그나마 지조가 부족한 선비들은 이왕 망하는 나라를 헐값(본인에게는 엄청난 고가)에 팔아넘길 궁리로 부지런히 눈을 깜박거렸다.

선비의 나라답게 모든 역사도 문인(文人)에 의해 문(文)의 시각으로 기술되었다. 그저 무인(武人)은 마지못해 키우는 사냥개나 날강도쯤으로 여겼다. 조선 전기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여진족 토벌에 혁혁한 공을 세워 27세에 병조판서에 올랐던 남이(南怡) 장군도 기어이 신숙주 · 한명회 · 유자광 등의 모함으로 죽임을 당했다. 무신(武臣) 주제에 감히 시(詩)를 읊어? 참, 죽이는 방법도 치사스럽기 짝이 없다. 급할 때는 나가 싸우라 해놓고, 크게 공을 세우면 반드시 죽여 버린다. 그래서 한참 잘 싸우고 있던 이순신(李舜臣) 장군도 너무 잘 싸우니까 잡아들여 죽지 않을 만큼 패놓아야 했다. 한두 번쯤 져주어서 도망도 가고 했어야지, 그랬더라면 한번 패배는 병가지상사라며 겁먹지 말고 다시 나가서 싸우라며 위로주를 내렸을 텐데 말이다. 하여간 이순신 장군도 너무 고지식하셨어! 전장에 나가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수많은 장수들에 대해선 입도 벙긋하지 않으면서, 팔자 좋은 선비가 기생놀음에 술 먹고 그럴듯한 시(詩) 한 수만 남겨도 청사에 길이 빛난다. 무신(武臣)이 전쟁터에서 비장한 마음에 호연지기로 쓴 시는 문학성(낭만성)이 떨어져 국어 교과서에 실릴 수 없다? 그리하여 조선시대는 무신(武臣)들을 모조리 거세시켜 버렸던 것이다. 허울이야 무반(武班)이지만, 사실은 하급 문반(文班)과 다를 바가 없었다.

선비는 체질적으로 도전과 모험을 싫어한다. 아니 겁낸다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전쟁을 기피한다. 그저 《정감록(鄭鑑錄)》이나 들여다보며 피난 갈 궁리나 하며 슬그머니 엉덩이를 뒤로 뺀다. 왜구가 그토록 자주 침입을 해왔으면 그때마다 군사를 끌고 건너가서 마땅히 혼을 냈어야 하는데, 오히려 선물 들고 찾아가 달래기에 바빴다. 그러니 조선의 왕이 일본 천황에게 조공을 바쳤다는 소리를 듣고, 계속해서 끊임없이 당했던 것이다. 노략질을 많이 할수록 조공(?)도 많이 가져오는데 가만히 앉아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지금도 그때와 그다지 다를 바가 없다.

문민정부 들어서니 예의 그 버릇이 다 나온다. 일본은 일본대로, 북한은 북한대로 그저 달래기에 급급하다. 미국도 달래고, 중국도 달래고, 러시아도 달래고. 기실은 사정사정하는 것이지만. 우린 평화를 사랑하고(평화를 싫어하는 민족이 세상에 어디 있나?) 전쟁을 혐오하는 민족이다. 우린 절대 싸울 의사가 없으니 제발 침략하지 말아 달라고. 그래서 백의민족인가? 아니면 바보 민족인가? 아예 ‘날 잡아 잡수세요’ 하는 꼴이다. 옛말에 “평탄한 길이라고 수레가 넘어지지 않던가? 거친 파도 속이라도 배가 건널 수 있는 법이다. 별 탈 없을 거라 짐작하면 반드시 변고가 생길 것이요, 변고가 생길까 걱정하며 대비하면 아무 탈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춘추시대 초(楚)의 왕손려(王孫厲)가 문왕(文王)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서(徐)의 언왕(偃王)은 인의지도(仁義之道)를 행하기를 좋아하여 한수(漢水) 동쪽의 32개국이 모두 그에게 복종하고 있습니다. 임금께서 만약 쳐부수지 않으면 우리 초나라도 언젠가는 그 서나라를 섬겨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 문왕은 “진실로 도(道)가 있는 나라라면 칠 수가 없소!”라며 반대하였다.
그러나 왕손려의 의견은 달랐다.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치는 것,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치는 것은 마치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삼키는 것과 같고, 호랑이가 멧돼지를 잡아 먹는 것과 같습니다. 어찌 그런 일에 이치가 맞지 않을까를 걱정하십니까?”
이에 문왕은 군대를 일으켜 서나라를 쳐서 잔폐시키고 말았다. 서 언왕은 죽음에 이르러 이렇게 한탄하였다.
“나는 문덕(文德)만 있으면 되는 줄 믿고 무비(武備)를 소홀히 하였다. 인의지도를 행하면 될 줄 알았지. 사람을 속이는 마음을 가진 자도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러니 옛 왕 노릇을 하는 자가 어찌 무비가 없을 수 있겠는가!
유향(劉向)의 《설원(說苑)》

산천이 셀 수 없이 바뀌어 양반 제도도 없어졌지만, 집집마다 족보 뒤지면 벼슬한 조상 한 사람 없을까만, 양반 아닌 집안 없다. 학교에서도 끊임없이 군자는 어떻고, 양반이란, 선비 정신이란…… 등등 가르치는 것이 옛날 서당과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선비 문화는 흰 쌀밥 문화이다. 쌀밥만 먹어서는 건강해질 수 없다. 잡곡을 섞어먹어야 한다. 흰옷 입었다고 고상하고 순결한 지조를 지니는 것 아니다. 그건 그냥 결벽증일 뿐이다.

이런 선비 문화의 찌꺼기들이 지금까지 남아 교육열, 입시 전쟁, 화이트칼라 선호, 입씨름 정치, 적반하장, 책임 회피, 복지부동, 코드 인사, 침도 마르기 전에 뱉은 말 주워담는 정치인들…… 등등 썩은 악취를 내뿜고 있다. 무엇보다 고약한 것은, 그러고도 부끄러움〔恥〕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보다 더 참기 힘든 것은, 부끄러운 줄 알면서도 오히려 더욱 뻔뻔스럽게 고개를 바짝 세우는 것이 무슨 절개인 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묵인하는, 용납되는, 신의(信義)도 없고 용기도 없는, 오물을 그대로 밟고 다니는 사회가 우리를 견딜 수 없게 만든다.

<이 글은 인터넷 신문 데일리안에 연재중인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