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십팔기협회 :::


   
  문(文)과 무(武)가 이룩한 결연한 바탕,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글쓴이 : 박금수     날짜 : 08-08-12 12:51     조회 : 6727    

이글은 EBS 다큐멘터리 매거진 <다큐 : 다> 창간준비 2호에 실린 글입니다.


                 
              조선의 문(文)과 무(武)가 이룩한 결연한 바탕 ,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

    지금으로부터 약 220년 전인 정조 14년 어느 날, 당시 규장각 검서관이었던 이덕무 박제가 등은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 만든 서책을 정조에게 바친다. 정조는 그 책을 살펴보고는 흡족한 표정으로 신하들을 돌아보며 그 책에 다음과 같은 이름을 하사한다.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그 뜻은 무예의 실제를 글[譜]과 그림[圖]으로 설명하고 무예와 관련된 다양한 정보를 담은 일종의 백과사전[通志]이란 뜻이다. 정조의 수많은 업적 중에서 무예도보통지의 편찬은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그 유례가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특기할만하다. 즉, 국왕의 명령으로 무예를 고증하고 엄선하여 그 결과를 책으로 낸 것은 전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하다는 것이다.
    정조는 이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기 위해 당시 총애하던 실학자 이덕무, 박제가를 투입하여 정조의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에 서국(書局 : 서적제작소)을 열고, 장용영의 초관(哨官 : 오늘날 육군 중대장 정도의 지휘관)인 백동수로 하여금 무예의 실기를 검토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무예도보통지는 정조시대의 문(文)과 무(武)를 대표하던 규장각과 장용영의 합작으로 탄생되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나라에서 무예서를 편찬한 것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우리역사상 최초의 무예서가 편찬되는 시점은 이 땅에서 한․중․일 삼국이 치열하게 싸웠던 임진왜란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1. 임진왜란과 한국 최초의 무예서『무예제보(武藝諸譜)』

    임진왜란은 일본군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아 국왕이 압록강까지 피난을 갔던 사상 초유의 국가적 위기였다. 당시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중국 명나라를 치러간다는 명분하에 조선에게 길을 내달라고 억지를 부렸고 조선정부가 거부하자 이를 구실로 전쟁을 일으켰다. 이 후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온 일본군이 보름 만에 남대문을 열고 한양에 입성할 정도로 전쟁의 양상은 일방적이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임진왜란 이전 조선은 고려 말부터 개발해온 우수한 화포(火砲)와 강력한 활을 사용해 해안에 침입한 왜구들을 제압해왔다. 일본은 습도가 높고 기술이 부족해 조선의 각궁(角弓)과 같이 강력한 활을 만들 수가 없었고 화포 또한 발달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장기인 긴 칼을 휘둘러보기도 전에 쓰러졌던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일본은 유럽을 통해 들여온 조총을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이를 사용하여 전국을 통일하였다. 일설에는 이 당시 일본에서 만들어진 조총의 수가 유럽전체의 조총의 수보다도 많았다고도 한다.   
    이 조총을 통해 일본군은 조선의 활과 대포에 맞설 수 있었고, 돌격대가 조총의 지원으로 조선군에게의 접근이 가능해지자 그들의 장기였던 검술이 빛을 보았던 것이다. 그동안 활과 화포를 이용한 일명 장병(長兵) 전술에만 익숙했던 조선의 병사들은 칼과 창을 제대로 휘둘러보지도 못한 채 왜군의 시퍼런 칼날 앞에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그러던 중 우여곡절 끝에 중국 명나라의 지원군이 도착하여 평양성을 탈환할 수 있었다. 여기서 조선은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된다. 명나라의 지원군들은 별로 쓸모가 없어 보이는 등나무로 만든 방패와 가지를 남겨놓은 대나무와 짧은 삼지창 등을 사용하여 일본군을 쓸어버리다시피 했던 것이다.
    왜군을 퇴치할 대책을 고심하던 조선은 이들의 무예와 전투방법을 받아들이기 위해 후에 조선후기 최대 군영으로 발전하는 훈련도감을 창설하고 병사들을 뽑아 등패(籐牌:등나무 방패), 낭선(狼筅:긴 대나무의 가지에 수많은 날카로운 날을 붙인 무기), 장창(長槍:긴 창), 당파(鎲鈀: 삼지창), 곤봉(棍棒: 나무 몽둥이), 장도(長刀: 긴 칼) 등의 무예와 조총술을 익히게 하였다.
    전통적으로 우수한 과학기술을 보유했던 조선은 조총을 만드는 데에는 그다지 큰 어려움을 겪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몸을 통해 전수되는 무예를 도입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특히 명나라 지원군은 이를 군사기밀이라 하여 자세히 가르쳐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훈련도감의 낭관(郎官)인 한교(韓僑)는 선조(宣祖)의 명을 받들어 은밀하고 끈질기게 명나라 장수와 접촉하여 많은 정보를 얻어내고, 이를 바탕으로 군사들을 훈련시켰다. 이렇게 명군의 무예를 우리의 것으로 소화시킨 결과로 『무예제보』를 편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남의 나라 땅에 와서 싸우던 명나라의 지원군은 임진강까지 내려오자 더 이상의 전진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미루었지만 훈련도감을 통해 육성한 정예병과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의 힘으로 조선은 왜군을 남해안까지 밀어낼 수가 있었다. 왜군은 결국 일본으로 탈출을 감행하다가 이순신의 공격을 받고 거의 궤멸하기에 이른다.


    2. 급부상한 여진족의 나라 '청(淸)'의 침략과 북벌(北伐)론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는 다시 화친을 맺고 평화관계를 회복하였지만 조선은 다시금 북방에서 이는 회오리에 촉각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명과 조선이 일본과의 치열한 전쟁에 몰두하는 사이를 틈타 만주를 통일한 후금(後金)의 세력이 커져 조선을 압박해오기 시작한 것이다. 유목민족인 여진족이 세운 후금은 특히 말을 타고 싸우는 기병(騎兵) 전술에 강하였다. 말의 빠른 속도와 가공할 충격력을 이용한 기병전술은 고구려의 상징이기도 했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기병이 있었지만 세력이 강대해진 후금을 상대하기에는 그 수가 부족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폐허가 된 나라를 재건해 가던 조선은 기병을 양성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또한 당시 집중적으로 양성했던 조총은 기병전술에 대해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그것은 한번 발사한 다음에 재장전하여 다시 발사할 때까지의 시간이 길다는 것이다. 속도가 빠른 기병이 그 틈을 노리고 돌격하면 조총은 한순간에 무용지물이 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후금과 싸우던 명나라의 요청을 받아 파견된 조선의 정예 조총병 200명이 단 한 번의 기병돌격에 의해 전멸된 사르허 전투에서 조선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에 조선은 후금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기병을 양성하고 또한 보병으로 기병을 상대하는 다양한 무예를 도입해야 했다. 광해군(光海君) 대에는 계속적으로 조총을 사용하는 포수(砲手)를 양성하는 동시에 보병으로 기병을 상대할 수 있는 무예를 도입하였다. 이 때 발간된 『무예제보번역속집(武藝諸譜飜譯續集)』에는 월도(月刀: 긴 자루에 큰 칼을 단 무기), 협도곤(夾刀棍 : 곤봉 끝에 칼을 끼운 무기), 구창(鉤槍: 짧은 창에 갈고리를 단 무기) 등 기병을 상대할 수 있는 무예가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무기들을 사용하여 말의 다리를 후려치거나 말을 탄 병사를 걸어서 끌어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인해 폐허가 된 조선이 전투력을 회복하여 급격히 팽창하는 청나라에 맞서기에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다.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일으킨 병자호란을 당해 인조(仁祖)가 굴욕적으로 청나라에 항복한 이후에  조선은 북벌론을 내세우며 계속적으로 무비(武備)를 강화하고 어영청(御營廳), 금위영(禁衛營), 수어청(守禦廳), 총융청(摠戎廳) 등의 부대를 창설하여 숙종(肅宗) 대에 이르면 이른바 조선후기의 5군영(軍營 : 군대) 체제가 완성되고 이들을 통해 꾸준히 다양한 무예가 도입되었다.
    조선후기의 군대는 크게 세 가지의 군사로 구성되었다. 조총과 화포를 사용하는 포수(砲手)와 활과 화살을 이용하여 공격하는 사수(射手)가 있었다. 포수와 사수는 모두 먼 거리에 있는 적을 공격고 적이 가까이 접근할 때에는 창과 검을 사용하는 살수(殺手)가 백병전을 치르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을 합쳐 '삼수병(三手兵)'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조선군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게 된 포수는 조총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칼을 보조무기로 항상 휴대하였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당시의 조총은 재장전 하는 데에 많은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포수들은 반드시 검술을 익히도록 규정되어 있었고, 전투 시에 화약을 모두 소비하거나 적이 가까이 접근했을 때에는 칼을 뽑고 백병전을 치를 수가 있어야 했다. 이 때문에 조총이 보급될수록 검술의 중요성도 동시에 높아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일본의 검술이 왜검(倭劍)이라는 이름으로 도입되어 일반병사들을 중심으로 보급되고 정예병과 장수(將帥)급 이상은 본래 조선에서 전래되던 예도(銳刀), 본국검(本國劍), 제독검(提督劍) 등을 익혔다.이렇게 조선은 기병전술을 주로 사용하는 청나라와 조총과 칼을 중심으로 보병전술을 구사하는 일본의 침략에 모두 대비하는 과정에서 가장 효과적이고 우수한 무예들을 수집하고 검토하여 군영에 도입해나갔다.


    3. 비운의 사도세자(思悼世子)와 그의 아들 정조(正祖)

    병자호란 때 임금이 청나라에 무릎을 꿇은 후 조선은 이 치욕을 씻기 위해 절치부심하였다. 특히 인질로  8년간 청에 끌려가 생활했던 경험이 있었던 효종은 은밀히 북벌(北伐)을 추진하였다. 효종은 그 자신이 뛰어난 무인으로, 어지간한 장수들은 들기도 어려운 무거운 월도를 자유자재로 휘둘렀으며, 궁궐 후원에서 말타고 활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비록 북벌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이로부터 약 100년 뒤 효종을 꼭 빼어 닮은 왕자가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뒤주에 갇혀 비운에 죽어간 사도세자(思悼世子)이다. 그는 특히 무예와 병학(兵學)에 관심이 많았으며, 당시 5군영의 실태에 불만이 많았다.
    조선후기의 5군영은 각 군영이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한 나라의 방위군으로서의 통일된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각각이 특정한 당파(黨派)와 연결되어 있어 국왕의 군 통수권이 사실상 유명무실하였다. 그리고 각 군영에서 익히는 무예와 세부적인 내용도 제각기 달랐다. 영조(英祖)에 의해 세자로 책봉되어 대리청정을 맡게 된 사도세자는 측근인 임수웅 등의 무관(武官)에게 명하여 각 군영의 무예를 비교, 검토하여 통일된 무예서를 만들도록 하였다. 이것이 바로 『무예신보(武藝新譜)』이다.
    임진왜란 직후 『무예제보』를 만들 때에는 없었던 무예를 시급히 도입하고 많은 수의 군사를 훈련시키기 위해 무예서를 만들었다. 하지만 『무예신보』를 편찬한 목적은 이와는 조금 달랐다. 일반적으로 무예서를 편찬하는 목적은 무예의 훈련과 평가에 대한 표준을 세우는 것이다. 특히, 무예를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느냐 하는 것은 바로 무과(武科)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 무인(武人)들에게는 매우 민감한 문제였다.
    사도세자는 자신의 친위세력을 중심으로 한 무예의 통일작업을 통해 흩어져 있던 병권(兵權)을 국왕에게 집중시키고 사리사욕을 위한 무예가 아닌 진정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한 무예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무예에 '십팔기(十八技)'라는 이름을 부여하였다. 십팔기란 중국의 '십팔반무예(十八般武藝)'나 일본의 '무예십팔번(武藝十八番)'과는 다른 '조선의 무예 18가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십팔기의 구체적인 종목은 『무예제보』에 수록된 등패, 낭선, 장창, 당파, 곤봉, 쌍수도 등 6가지에 죽장창(竹杖槍), 기창(旗槍), 예도(銳刀), 왜검(倭劍), 교전(交戰), 제독검(提督劍), 본국검(本國劍), 쌍검(雙劍), 월도(月刀), 협도(挾刀), 권법(拳法), 편곤(鞭棍) 등 12가지를 추가하여 총 18가지이다.
    그러나 사도세자가 그 뜻을 제대로 펴보지도 못하고 비운 속에 세상을 뜨자 이러한 시도는 자칫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이러한 예로는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난 광해군 대에 편찬된 『무예제보번역속집』이 후세에 거의 전해지지 않은 사실이 있듯이 비정상적인 절차로 물러난 왕이나 세자의 정책과 업적은 폐기처분되기가 쉬웠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의 아들 정조가 무사히 왕위에 등극함으로써 사도세자의 뜻은 온전히 이어질 수 있었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아버지 사도세자가 정한 십팔기의 모든 종목을 정식 무과과목으로 채택하고 또한 십팔기 중 창, 월도, 쌍검, 편곤을 말을 타고 사용하는 기창(騎槍), 마상월도(馬上月刀), 마상쌍검(馬上雙劍), 마상편곤(馬上鞭棍)도 『무예신보』에 추가하고 정식 무과과목으로 정하였다. 또한 장용영에 '십팔기군(十八技軍)'이라는 편제를 만들어 장용영 병사들의 무예훈련을 직접 챙겼고 무예교관을 '십팔기교관(十八技敎官)'이라 불렀다. 정조는 이에 그치지 않고 놀이를 통해 승마기술을 강화 수 있는 격구(擊毬)와 마상재(馬上才)를 덧붙이고 각 무예에 관련된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고 정리하여 총 24항목으로 된 조선무예의 결정판『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도록 명하였다.


    4. 조선의 멸망과 십팔기의 부활

    위와 같은 과정을 통해 정립된 십팔기는 정조가 사망하고 장용영이 해체된 뒤에도 계속적으로 조선의 공식무예로 굳건히 자리를 지켜갔다. 특히 국왕을 호위하는 무예청(武藝廳)이나 훈련도감의 별기군(別技軍)의 경우 십팔기의 모든 종목을 익혀야 했다.
    하지만 당장 국경을 넘어 쳐들어오는 적은 무예로 막을 수가 있지만 기울어져가는 국운(國運)은 무예로 지켜갈 수가 없는 것이었던 것 같다. 상무(尙武)의 기풍이 쇠락해가던 조선은 근대화의 물결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일제에 의해 훈련도감 등의 5군영, 이른바 구식군대가 해체되자 『무예도보통지』와 십팔기 또한 역사 속으로 사라져갈 위기를 만났다.
    하지만 해체된 구식군대 출신의 무인들은 이후 항일의병투쟁과 해외무장투쟁에 대거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 해방 후 처음으로 맞은 개천절 경축식에서 국궁(國弓)과 함께 십팔기의 시범이 동대문운동장에서 거행된 것이다. 이에 관한 기사가 매일신보 1945년 11월 8일자에 자세히 나와 있다. 우리의 민속놀이인 씨름과 택견도 자주 금지됐던 일제치하에서 십팔기는 거의 전승이 될 수가 없었으니, 이날 십팔기의 시범을 보인 이들은 조국이 해방되자 귀국한 독립군 출신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조선의 무예 십팔기는 조국의 독립의 위해 싸운 조선의 무인들에 의해 면면히 계승된 것이다. 이후 십팔기를 전승한 김광석 선생이 1960년부터 십팔기를 다시 대중에게 보급하고, 1987년 민속학자 심우성 선생과 공동으로『무예도보통지 실기해제』(도서출판 동문선)를 발간하며 십팔기의 맥은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5. 마치며

    조선의 무예 십팔기는 우리 조상들이 이 땅을 지켜내기 위해 흘렸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무예이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실전을 겪으면서, 한국의 무예는 물론 중국과 일본의 무예까지 가장 우수한 것들만 엄선하여 정리한 것으로 가히 동양무예의 총화(總和)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집대성한 『무예도보통지』는 세계적인 기록물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근대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자신들의 전통무예를 근대적인 스포츠로 만들어 이를 통해 자국의 젊은이들을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는 엘리트로 육성하였다. 펜싱은 중세 검술에서, 럭비는 군사들의 진법(陣法) 훈련에서 유래하였으며, 현대체조의 근간인 독일체조의 경우에도 강한 군사와 국민을 만들어 내기 위한 얀(Friedrich Ludwig Jahn)의 '트루넨(Turnen)' 운동에서 출발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서양 스포츠의 '정신'은 빼고 '제도'만이 우리에게 도입될 수밖에 없었던 것에서 오늘날 우리 신체․체육문화의 왜곡이 기인한 것은 아닐지.
    이들보다 훨씬 뛰어난 전통무예와 그에 관한 상세한 기록을 갖고 있는 우리가 오늘날 해야 할 일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민족은 이제 역사의 질곡을 벗어나 세계로 비상해야할 중요한 시기를 맞고 있다. 우리의 정신을 상징하는 것은 우리의 역사를 배경으로 할 때 온전히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분명히 할 때 『무예도보통지』와 십팔기는 그 현재적인 가치를 다시 발산해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