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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학지도(武學之道)
  글쓴이 : 신성대     날짜 : 08-04-14 16:34     조회 : 6927    

유가(儒家), 무가(武家), 병가(兵家), 도가(道家), 불가(佛家)를 막론하고 ´지(智)´를 주요 덕목으로 꼽지 않는 데가 없다. 어디 그뿐이랴. 지(智), 덕(德), 체(體)를 교육 활동의 목표로 내걸고 있는 학교는 말할 것도 없고, 정계, 재계, 예술계, 스포츠계 등등, 굳이 철학을 들먹이지 않아도 모두가 지(智)를 최고의 가치로 받들고 있다. 또 계속해서 보다 나은, 보다 새로운 지식 혹은 아이디어를 추구하기에 여념이 없다. 사실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것이 지(智)의 활용이 아니던가.

너무도 타당한 이 지(智)를 굳이 손가락 꼽아가며 덕(德)으로 내세우지 않아도 될 터인데, 아마 열심히 공부하라는 뜻으로 끼워넣은 모양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우리는 흔히 ´지(知)´와 ´지(智)´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고 혼용하고 있다. 또한 대부분이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까지 나왔으니, 그까짓 ´지(智)´에 대해 별로 아쉬울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사회에 나가서도 계속해서 새로운 학문, 새로운 기술을 습득해야 한다며 꾸준히 공부할 것을 요구받지만, 사실 배움의 끝이 어디 있으랴. 그저 ´지(智)´나 ´지(知)´ 모두 ´공부´라는 생각뿐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철학을 ´지혜에 대한 사랑과 추구´라고 하였다. 칸트는 철학을 ´지혜에 대한 교리이고 실천´이라 말하였다. 철학은 일개 학문도 인식도, 게다가 지식도 아니라고 했다. 바로 지식에 대한 자유로운 성찰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지혜란 무엇인가? 그리고 지식이란 무엇인가? 지혜란 인식하고 도달해야만 되는 삶에 대한 진리이다. 삶에 대한 사랑이다. 또한 삶에 대한 책임이다. 역시 그리스인들은 이론적이거나 관조하는(sophia) 지혜와 실용적인(phronesis) 지혜를 서로 견주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그 중의 하나는 다른 하나 없이는 불가능할 것은 자명한 사실. 따라서 진정한 지혜는 이 둘의 병합일 것이다.

지혜는 사고, 지능, 지식 등, 요컨대 실제로 어떤 지식으로 간주되는 것일 테지만, 그것은 단지 이론만이 아닌 실천과 관계가 있다. 따라서 증거가 아니라 시험이다. 실험이 아니라 실습이다. 학문(學問)이 아니라 삶이다. 데카르트는 ´잘 행하기 위해 잘 판단하는 것´이라고 했다. 공자(孔子)도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하였다. 더 나아가 ´배우고 익힌 것을 행하면 더욱 즐겁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안다는 것으로서의 지(知)와 슬기로서의 지(智)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알고 있는 것을, 배운 것을, 인식하고 있는 것을 운용(運用)할 때 비로소 지(智)가 되는 것이다. 머릿속에 온갖 지식과 학문을 잔뜩 넣어다니는 것으로 스스로 지식인인 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은 그저 자신의 눈과 입을 즐겁게 하기 위한 고물 수집 취미에 다름 아니다. 도서관의 수십만 권 책이나 인터넷상의 온갖 자료들도 단순한 지식 혹은 정보일 뿐이다.

행(行)으로 드러나야 비로소 덕(德)으로서의 지(智)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지식인(知識人)과 지식인(智識人)은 구별되어야 한다.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조작 사건은 지(知)와 지(智)의 좋은 예이다. 조선시대나 작금의 우리 사회를 보아서 알 수 있듯이, 전자만 많아지면 세상이 얼마나 피곤해지는지를 잘 알 수 있다. 많이 아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지(知)를 덕(德)으로 바꾸는 것이 진정한 지혜이다. 바로 이 때문에 행동하는 철학으로서 무덕(武德)이 필요한 것이다.

지혜롭지 못하면 그 몸이 고달프듯이 지(智)가 부족하면 충(忠)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오히려 해가 될 뿐이다. 또한 용(勇)과 의(義)는 희생만 부를 뿐, 결코 공(功)을 이룰 수가 없다. 반면에 지(智)가 덕(德)의 보필을 받지 못하면 총칼보다 더 무서울 때도 있다.

지(智)는 훌륭한 스승을 만나 배우고 익혀야 얻을 수 있다. ´훌륭한´이라고 했다. 유명하다고 다 훌륭한 것은 아니다. "나, 여기 있소" 하는 사람치고 훌륭한 사람 없다. 수많은 제자들을 끌어모으려 드는 사람치고 제대로 된 스승 없다. 그건 장사다. 지(知)는 팔아먹을 수 있지만, 지(智)는 그렇게 전해 줄 수가 없다. 석가, 예수, 공자가 언제 수백 수천 명씩의 제자들을 거느렸던가? 기껏해야 열 손가락 내외다. 그러면 오늘날처럼 큰 대학이나 학원을 차려 수천 혹은 수만 명이 배워 나갔으니 그들은 제자가 아니란 말이느냐고 응수할 수도 있겠다. 물론 그들도 제자가 맞다. 그렇지만 잠시 거쳐 간, 지(知)를 배워 간 제자일 뿐이다.

그 정도만으로 스승의 모든 것을 배워 체득했다고는 할 수가 없다. 하물며 구전심수(口傳心授)하지 않으면 결코 제대로 가르칠 수 없는 무예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다고 꼭 열 명만 제자로 받겠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수만 명이 거쳐 가지만, 그 중 잘해야 한두 명 건진다는 말이다. 그만한 자질을 갖춘 사람이 드물고, 또 그것을 갖추었다 해도 항심(恒心)으로 꾸준히 해낼 수 있는 인물은 더더욱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스승으로서도 자신의 법(法)을 전해 줄 수 있는 재목감을 제자로 둘 수 있다면 그만한 행운이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훌륭한 스승을 만난다면 이미 절반은 성공한 것이다.

그나마 글로 전하여지는 학문은 수많은 책을 통해 수천 년 전의 훌륭한 학자들을 스승으로 삼고 배울 수가 있다. 그렇지만 무예(武藝)는 그럴 수가 없다. 수천 년에 걸쳐 천하에는 수없이 많은 무예가 생겨나고 사라지고 했지만, 그것을 책으로 남긴 예는 극히 드물다. 그것은 문중의 비기(秘技)이자 국가의 기밀(機密)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개인이 사사로이 지도 한 장 품고 다녀도 의심쩍게 여겨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다. 하물며 무예의 실기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물론 오늘날에는 책방에 넘쳐나는 것이 무예서이지만, 무예의 본고장인 중국에서도 모원의(矛元義)가 《무비지(武備志)》를 편찬하면서 모은 몇 가지 무예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 외에 여러 무예의 기록이 있지만 대부분 현학적이고 실기와는 거리가 먼 철학적인 용어들로 모호하기 짝이 없게 기술된 것들이거나, 대개는 ´기본´이 되지 못하는 것들뿐이다.

 
 

명문가에서도 무예 실기는 대개 구전심수(口傳心授)로 전해져 왔다. 간혹 글로 남기기도 하지만, 그것마저도 불과 몇십 자의 가결(歌訣)로 되어 있어 설령 외부인들이 그것을 보더라도 해득할 길이 없다. 무학(武學)이 깊은 이라도 그것을 보고서 나름대로 대충 짐작할 수는 있지만, 완전히 그 실기를 체득하기란 쉽지 않다. ´십팔기´를 정리해 놓은 《무예도보통지》만 하더라도 동양 3국에서 가장 잘 짜여져 있으며, 동작 하나하나를 그림과 설명으로 (언문과 함께) 더없이 잘 나타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범 선생이 그 실기를 공개하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흉내조차 내보지 못했던 것이다.

무예 수련 역시 먼저 명문가의 훌륭한 스승을 찾아야 한다. 이 또한 지혜가 필요한 일이다. 세상 살기가 힘들어질수록 풍기문란해지고 혹세무민하는 황당한 종교 혹은 미신, 그리고 온갖 참언(讖言)이나 방술(方術) 등이 기승을 부리게 마련이다. 스스로 바른 생각을 가지고 자신을 지키고 다스리지 못하면 비싼 대가를 치르거나 헛된 삶을 살기 쉽다. 맹신은 편견을 불러오므로 절대 금물이다.

배우는 일이나 가르치는 일 모두 냉철한 지혜를 필요로 한다. 식당 메뉴판처럼 걸려 있는, 돈 주면 누구나가 배울 수 있는 몇 가지 재주를 배워 익혀 몇 단(段) 취득했다고 해서 마치 무예의 고수가 된 것처럼, 곧 신선이 될 수 있을 것처럼 우쭐해서도 안 된다. ´제대로´ 배운 것을 끊임없이 연습하고, 공부를 계속해야 한다. 불가(佛家)에서도 ´공부를 하는 데는 의심(疑情)을 일으키는 것이 중요하다. 의심하지 않으면 깨달음도 없다´라고 하였다. 또 착실하게 말을 잘 들으면 지혜가 없는 것이요, 순종하지 않으면 도리어 지혜로운 것이라는 말이 있다. 처음 배운 수련법대로 평생을 똑같이 하는 것은 무지한 일이다.

"똑같은 초식도 처음과 지금이 무한히 달라야 한다. 사방에 물어 훌륭한 무인들을 찾아, 보고 묻고 배워 나가면서 자신의 무예를 완성해야 한다. 그렇다고 이것저것 천하에 널려 있는 온갖 기예들을 주워모아 담고 다니라는 말이 아니다. 그건 지극히 미련한 짓이다. 전투하러 나가는 병사가 무기란 무기를 모조리 다 짊어지고 나가는 꼴이다.1백 가지 기예를 욕심하지 말고, 한 가지 기예에 정심할 것"을 해범 선생께서는 누누이 당부하였거니와, 덧붙여 "무예에서(수양에서도) 완성이란 없다. 무한히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기예와 이론은 물론이고 인접 학문까지 두루 배워 끊임없이 자신과 기예를 다듬어 나가야 한다. 그것이 무예의 길이고, 그 길은 끝이 없다. 무언(武諺)에 이르기를 "스승은 문으로 들어오도록 이끌어 주지만, 수행은 본인에게 달려 있다師父領進門, 修行在個人"고 하였다.